식진암(識盡庵)/칠각지(七覺支)

2. 택법각지 (擇法覺支, dhammavicaya) - 법을 검토하여 스스로 증득함(自內證)

이르머꼬어리서근 2012. 1. 15. 12:19

 

II. 택법각지 (擇法覺支 dhammavicaya)


 

두 번째의 깨달음 인자

법[dhamma]을 예리하게 검토하는 ‘택법(dhammavicaya)’이다.

 

 

이것은 사람이나 신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구성요소들의 진정한 성질을 이해하는

날카로운 분석적 지식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즉 법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구성물들을 궁극에 이르기까지 그 근본적 요소를 분석해 들어가는 것이다.

 

 

 

예리한 검토를 통해

우리는 마치 홍수를 이룬 강물이 범람의 절정에 이르렀다가 차츰 세력을 잃어버리듯이

 

모든 복합적 사물들이 믿을 수 없으리만큼 빠르게,

일어나서(uppāda), 절정에 이르고(ṭhiti), 사라지(bhaṅga) 찰나들을 통과하고 있는 것

이해하게 된다.

 

전 우주는 연속되는 단 두 찰나조차 똑같은 채로 남아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사실 모든 것은 원인(hetu)ㆍ조건지움[ paccaya]ㆍ결과(phala)라는 틀의 지배

받는다.

 

체계적인 사념(yoniso manasikāra)은 올바른 마음챙김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며,

우리가 식별하고, 추론하고, 검토하게끔 강력히 밀어 붙인다.

 

깊지 못한 생각, 체계적이지 못한 사념은 머리를 혼란시키고,

그런 상태에서는 사물의 성질을 제대로 검토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원인과 결과, 씨앗과 열매, 형성된 것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볼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법은 현명한 이들을 위한 것이지 현명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13)

 

                                                                                                 * 『증지부』 8법집, Ⅳ권, 229쪽


 

불교에서는 그 어떤 강제와 강요도 하지 않으며

불자들에게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멈칫거리면서 불교에 첫발을 디디는 사람들은

불교가 자신들에게 얼마든지 검토 확인해 보라고 권한다는 것을 알고서 무척 반가워할 것이다.

 

시종, 불교는 눈이 있어 볼 수 있고 마음이 있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든 활짝 열려 있다.

 

 

 

부처님께서는 따르는 이들에게서

당신과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맹목적이며 순종적인 믿음을 짜내려 애쓴 일이 없었다.

 

그분은 제자들이 분별력을 키우고 지성에 의해 확인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깔라마인들의 질문을 받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그대들이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의심스럽고 명백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대하면 마음에 혼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譯8)

 

                                                                                            * 8)『증지부』3법집, Ⅰ권, 189쪽


 

경전에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서

‘우리는 우리 스승을 존경하니까 그분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존중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대 자신들이 스스로 알고, 보고, 터득한 것이 아니겠느냐?"14)譯9)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 『중부』 38경, 265쪽


 

이처럼 철저하게 견지된 성실무비한 확인 자세는

후대의 현자들에게도 정확하게 그대로 이어졌다. 그들 역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
 

현명한 이가 금의 순도를 시험하기 위해서

 한 조각의 시금석을 사용하여 금을 태워 보기도 하고 잘라 보기도 하고

 엄밀하게 검사도 해보듯이,  

 

 여러분들은 내 말을 잘 검토해보고 나서 받아들여야지,

 단지 를 존중하고 존경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15)

 

                                   * 『자나사라 - 사무짜야(Jhānasāra-Samuccaya :선의 본질 모음)』 31쪽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분석 위주이기 때문에

맹목적 믿음은 배격될 수 밖에 없다.

 

법의 진리성은

고요한 집중적 사고와 통찰력[]을 통해서만 파악되는 것이지

맹목적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찾아 나아가는 사람은 피상적인 지식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깊이 파고들어 그 바닥에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불교는 그런 종류의 탐구를 장려한다.

그런 방식의 탐구가 정견()을 이끌어낸다.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한 번은 니간타 나타뿌따(자이나교 교주)의 열성스런 제자인 우빠알리가 부처님을 찾아와,

법문을 경청하고서 신심(saddhā 지식에 바탕한 확신)이 일어나

그 자리에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싶은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우빠알리여,

  어떤 진리든 철저히 검토 확인해 보도록 하라.”

 

고 말씀하시어 빠알리를 만류하셨다.譯10)

                                                                                     * 『중부』56「우빠알리 경」Ⅰ권, 379쪽


 

이 사건은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당신이 생각하는 길로 끌어들이거나,

추종자로 끌어들이는 일에 열중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그 분께서는 다른 사람의 사상의 자유에 개입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사상의 자유는 모든 개인의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그의 견해와 성격, 정신적 기질과 성향에 맞는 생활태도를 버리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어떤 형태로든 강제는 나쁘다.

 

군가에게 그 사람이 흥미 없어 하는 신념들을 억지로 삼키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가장 고약한 강요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렇게 억지로 먹인 음식은 어떤 세계의 어떤 존재에게도 유익할 수 없다.

 

 

 

법에 대한 조사 검토택법을 닦는 비구는

 

마음을 오취온에 집중시켜

이 맨 세력들의 집적(集積)譯11),

‘명색의 합류’가 생멸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려고 애쓴다.

 

                                                                     * 맨 세력들의 집적 :

                                                                        영문 ‘conglomeration of bare forces’의 축어역.

                                                                        빠알리 원문은 ‘suddha saṅkhāra puñja’이다.

 

그가 긍극적 깨달음의 즐거운 예고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마음과 몸의 덧없는 성질을 충분히 깨달을 때 만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읊어진다. 
 

"온()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정념하면서

 그는 순수한 기쁨과 유열(愉悅)을 경험한다.

 아는 이들에게 그것은 곧 불사(不死)이다."16) 譯12) 

                                                                                                               * 『법구경』게송 374


 

무상하고 영속하지 않는 것을 그는 고()로 가득 찬 것으로 본다.

 

그는 무상하고 고로 가득 찬 것을,

영원하고 영속하는 영혼이나 자신, 또는 자아가 없는 것으로

즉 실체가 공한 것으로 안다.

 

 

 

무상ㆍ고ㆍ무아의 세 가지 특성 또는 법칙들에 대한 이와 같은 파악,

이와 같은 깨달음을

불자들은 통찰지(penetrative insight, vipassānā-ñāṇa)라 일컫는데,

 

이 통찰지는 시퍼런 칼날 같은 것으로

모든 잠재적 성향(anusaya)을 완전히 뽑아내며

그럼으로써 고의 원인 뿐 아니라 그 곁가지들마저도 하나 빠짐없이 파괴시켜 버린다.

 

고의 원인이 되는 온갖 잔가지들이 궁극적으로 파괴되는 것도 바로 이 깨달음을 통해서이다.

 

 

 

러한 정상의 지견에 오른 사람은 완전한 이,

아라한이며,

 

그의 지견의 밝음은, 그의 통찰의 깊이는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고,

모든 피상적인 모습 뒤에 가려있는 진정한 본성을 인식한다.

 

그는 더 이상 하루살이 것들의 마력에 이끌려 들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두렵고 끔찍한 겉모습에 혼란을 일으킬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현상에 대해 흐릿한 시력을 갖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통찰지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완전한 면역성을 통해서

잘못을 저지를 여지가 전혀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