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칠각지(七覺支)

들어가는 말

이르머꼬어리서근 2012. 1. 13. 11:06

 

불교 경전인 삼장에는

부처님께서 때와 장소에 맞추어 다양하게 설하신

깨달음의 인자[覺支]譯1)에 관한 법문들이 많이 들어 있다.

 

 

 

『상응부』5권 「대품」에는 ‘봇장가 상응’이라는 제목의 장()이 눈에 띄는데,

그 장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깨달음의 인자에 관해 부처님이 설하고 계시다.

 

그 중에서 우리는 부처님 재세시 이래 지금까지

불자들이 고통을 받거나 병이 들거나 재난을 당했을 때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호신주로 암송해 온 법문이 셋이나 나란히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봇장가(bojjhaṅga)’라는 단어는

‘보디(bodhi)’라는 말과 ‘앙가(aṅga)’라는 말을 합성하여 만든 것이다.

 

‘보드(bodh)’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사성제의 깨달음과 관련된 통찰력을 뜻한다.

 

사성제란

고()의 성스러운 진리,

고의 원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고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를 이른다.

 

‘앙가’는 요소, 인자(因子), 팔다리[] 등을 뜻한다.

 

그러므로

‘봇장가’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요인, 또는 통찰이나 지혜를 이끌어 내는 인자를 의미한다.

 


 

“세존이시여,

‘깨달음의 인자!’, ‘깨달음의 인자’라고들 하는데 여쭈옵느니,

 어떤 까닭으로 깨달음의 인자라고 부릅니까?”라고 어느 비구가 여쭈었다.

 

“비구여,

 그들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다.

 그래서 그렇게 불린다.

 

부처님의 간명한 대답이셨다.1)     

                                                         * 『상응부』5권, 72쪽

 

 


 

또 이런 비유로 설명하시기도 한다. 
 

뾰족지붕 집의 서까래들은

 모두 꼭대기 쪽으로 향하고, 꼭대기 쪽으로 쏠리고, 꼭대기에서 합쳐진다.

 그래서 꼭대기를 그 모두의 정점이라 부른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칠각지를 닦고 많이 익힌 비구는,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쏠리고 열반으로 나아간다.”2)   

                                                                                              * 『상응부』5권, 63쪽

 

 

깨달음의 일곱 가지 인자는 다음과 같다.
 

1. ( sati) - 마음챙김

2. 택법(擇法 dhammavicaya) - 법의 검토3)

3. 정진(精進 viriya) - 활기찬 정진력

4. ( pīti) - 기쁨 또는 환희

5. 경안(輕安 passaddhi) - 고요

6. ( samādhi) - 집중

7. ( upekkhā) - 평온

 


 

깨달음의 인자들에 대한 설법 중 하나를 소개한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죽림원에 있는 다람쥐 먹이 주는 공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때 삡팔리(후추나무의 일종) 굴에서 지내고 있던 마하 깟사빠(대가섭) 존자

 중병에 걸려 앓고 있었다.

 

 해질 무렵 부처님께서는 독좌(獨坐)를 풀고 일어나셔서 마하 깟사빠 존자를 방문,

 자리에 앉으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래, 깟사빠여 좀 어떠신가?

 견딜 만하신가, 참아낼 만하신가? 통증이 줄어드는가, 늘어나는가?

 통증이 더 심해지지 않고 기우는 기미라도 보이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견디기가 힘듭니다. 참아내기가 어렵습니다. 통증이 아주 심합니다.

 통증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깟사빠여,

 깨달음의 일곱 가지 인자들은

 내가 잘 설하였고, 잘 닦았고, 많이 익힌 바요.

 

 이 인자들을 잘 닦고 많이 익히면

 완전한 깨달음[증지(證智)]譯2)에,

 완벽한 지혜[등각(等覺)]譯3)에,

 열반에 이르게 된다오.

 

 

 

 그 일곱 가지란 어떤 것인가?

 

 1. 깟사빠여,

     염()각지는 내가 잘 설하였고, 잘 닦았고, 많이 익힌 바요.

     염각지를 잘 닦고 많이 익히면 증지에, 등각에, 열반에 이르게 되오.

 

 2. 깟사빠여,

     택법(擇法)각지는 내가 잘 설하였고, 잘 닦았고, 많이 익힌 바요.

     택법각지를 잘 닦고 많이 익히면 증지에, 등각에, 열반에 이르게 되오.

 

 3. 깟사빠여,

     정진(精進)각지는 내가 잘 설하였고, 잘 닦았고, 많이 익힌 바요.

     정진각지를 잘 닦고 많이 익히면 증지에, 등각에, 열반에 이르게 되오.

 

 4. 깟사빠여,

     희()각지는 내가 잘 설하였고, 잘 닦았고, 많이 익힌 바요.

     희각지를 잘 닦고 많이 익히면 증지에, 등각에, 열반에 이르게 되오.

 

 5. 깟사빠여,

     경안(輕安)각지는 내가 잘 설하였고, 잘 닦았고, 많이 익힌 바요.

     경안각지를 잘 닦고 많이 익히면 증지에, 등각에, 열반에 이르게 되오.

 

 6. 깟사빠여,

     정()각지는 내가 잘 설하였고, 잘 닦았고, 많이 익힌 바요.

     정각지를 잘 닦고 많이 익히면 증지에, 등각에, 열반에 이르게 되오.

 

 7. 깟사빠여,

     사()각지는 내가 잘 설하였고, 잘 닦았고, 많이 익힌 바요.

     사각지를 잘 닦고 많이 익히면 증지에, 등각에, 열반에 이르게 되오.

 

 

 깟사빠여,

 이 일곱 가지 인자는 실로, 내가 잘 설하였고, 잘 닦았고, 많이 익힌 바요.

 이들을 잘 닦고 많이 익히면 증지에, 등각에, 열반에 이르게 된다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들이야말로 깨달음의 인자들입니다!

 

 잘 오신 분[善逝]이시여,

 참으로 그들이야말로 깨달음의 인자들입니다!”라고

 마하 깟사빠 존자가 탄성을 발했다.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하셨고,

 마하 깟사빠 존자는 그 말씀을 환희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하 깟사빠 존자는 병석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서 바로 마하 깟사빠 존자의 병이 사라져버린 것이다.”4)

                                                                                                       * 『상응부』 5권, 79-80쪽


 

앞서 언급했던 세 법문 중 또 하나는 「마하 쭌다 각지 경」인데,

거기서는 한때 부처님 당신께서 병환이 나셨을 때,

마하 쭌다 존자에게 깨달음의 인자들을 낭송하게 하여

그것을 들으면서 부처님의 중환이 바로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5)

                                                                                                        * 『상응부』 5권, 81쪽

 

 

사람의 마음은 몸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심대한 변화마저도 일으킨다.

만일 나쁘고 해로운 생각을 품고 부도덕한 쪽으로 작용하도록 방치하면

마음은 큰 불행을 야기할 수 있고 심지어는 남을 죽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또 마음은 병든 몸을 낫게 할 수도 있다.

정견(正見)을 갖고 정사(正思)에 집중할 때

마음이 가져올 수 있는 효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마음은 병이 나게 할 뿐 아니라 병을 낫게 하기도 한다.

 낙천적인 환자가, 걱정이 많은 비관적인 환자보다 병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다.

 믿음으로 병을 고친 사례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 중에는

 심지어 신체기관의 질환까지도 거의 순간적으로 치유된 예들이 실려 있다.”6)

 

 


 

불법(Buddha-dhamma)은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깨달음을 증득하기를 열망하는 이는

우선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들에 대하여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생은 고()다.

그리고 그 고는 무명에 기인한다.

무명은 경험할 가치도 없는 것, 이른바 악을 경험하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논한다면 무명은,

 

1) 제 온(諸蘊)모여 뭉치는 성질대한 무지4),

 

2) 감각기관과 감각대상[諸內外處]

    원래 따로따로여서 서로 무관한 성질의 것이라는 점에 대한 무지,

 

3) 제 요소들[諸界]공함 또는 상대적 존재성에 대한 무지,

 

4) 감각통어 기능들[諸根]월등한 성질에 대한 무지,

 

5) 네 가지 진리[四聖諦]무오류성 즉 여여성(如如性)에 대한 무지

 

를 말한다.

 

 

 

그리고 이 무명을 키우는 영양소 또는 전제조건은 다섯 가지 장애들이다.

이들이 장애라 불리게 된 것은 그것들이 철저히 포위하고 가로막고 방해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로부터 헤어나는 길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 다섯 장애는

 

1) 관능적 욕망(kāmacchanda),

2) 염오(vyāpāda),

3) 마음[]과 그에 부수하는 정신작용들[心所]의 혼미(thīnamiddha),

4) 들뜸과 회한(uddhaccakukkucca),

5) 의심(vicikicchā)

 

이다.

 

 

 

그러면 이들 장애를 키우는 영양소는 무엇인가?

세 가지 나쁜 생활 양태, 즉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범하는 잘못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양소는

다시 감관의 무절제[ 不防護]에 의해 영양보급을 받는다.

 

이 감관의 무절제를 주석가들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감각기관에 욕심과 미움이 들어오는 것을 방치하는 것

이라고 설명한다.

 

 

 

무절제를 키우는 영양소정념정지(正念正知)의 결여라고 설명된다.

 

이를 영양소의 관점에서 살피면

음챙김의 대상[]이 마음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표류해 버리는 것,

다시 말해 무상ㆍ고ㆍ무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특질에 대한 인식이 마음에서 일탈해버리고

그래서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챙기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것

무절제를 키우는 영양소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이나 행위를 할 때 온갖 자유를 자신에게 허용하는 것,

그리고 요령 없는 망상 덩어리에 고삐를 쥐어주는 것은

우리가 무상이라든가 기타 사물의 특질을 마음에 새겨 담지 않았을 때, 즉 정념(正念)을 결여했을 때 범하게 되는 과오이다.

 

 

다음, 정지(正知)의 결여란 아래 네 가지의 결여를 말한다. 곧

 

1) 목표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sāttha sampajañña),

2) 유익성 여부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sappāyo sampajañña),

3) 마음의 의지처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gocara sampajañña),

4) 미혹되어 있지 않음[無癡]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asammoha sampajañña)

 

의 결여이다.

 

 

사람이 올바른 목표도 없이 어떤 일을 할 때,

 

선()의 증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물에 관심을 쏟거나 그런 행위를 할 때

또는 향상에 해로운 행위를 할 때,

 

정진하는 사람의 진정한 의지처가 되는 정법을 잊고 있을 때,

 

미혹한 나머지

엉뚱한 것들을 즐겁다고, 아름답다고, 항상하고 실질적인 것이라고 믿고 붙들 때,

 

이처럼 분명한 알아차림이 없는 채 행동할 때 역시, 무절제는 증장된다.

 

 

 

 

그리고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알아차림[正知]을 이처럼 결여하게 되는 것은

그 바닥에 비체계적 사념(思念)(ayoniso manasikāra)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헌들에 의하면 비체계적 사념이란

바른 길을 벗어난 생각으로,

 

무상(無常)을 항상(恒常)으로,

고(苦)를 낙(樂)으로,

무아(無我)를 아(我)로,

불선(不善)을 선(善)으로

 

여기는 따위이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저 윤회가 알고 보면 비체계적 사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비체계적 사유가 증장할수록 두 가지가 가득 차게 된다.

무명존재에의 갈애[有愛]가 그 둘이다.

 

 

 

무명이 있음으로써 그 모든 고()의 연기(緣起)가 있게 된다.

 

그래서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은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는 배처럼,

강물의 소용돌이에 빠진 가축 떼처럼,

연자방아에 매인 소처럼 맴돌면서

 

회를 계속 한다.

 

 

 

불․법․승에 대한 확고하지 못한 믿음이 비체계적 사념을 증장시키는 조건이며,

 

 

 이 확고하지 못한 믿음은 정법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경에는 쓰여 있다.

 

 

사람들이 정법을 못 듣는 이유는

정도를 걷는 현명한 사람들과의 사귐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정법을 존중하는 선한 사람들과의 교류가 부족한 데 있다.

 

이렇듯 착하고 덕 있는 도반과의 교우(kalyāṇa mittatā)의 결여가

바로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의 기본적인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이제 그 역으로 말하자면 모든 선()의 기반이자 영양소는

착하고 덕 있는 도반과의 사귐이라 할 수 있다.

 

 

 

 

1) 이런 좋은 사귐

2) 숭고한 법이라는 영양소를 공급해 주고

3) 다시 이 영양소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신을 일으킨다.

4) 삼보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되면 깊고 체계적인 생각,

5) 마음챙김과 분명한 알아차림,

6) 감관의 제어,

7) 세 가지 올바른 생활양태,

8)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

8) 일곱 가지 깨달음의 인자,

9) 지혜를 통한 해탈 등이

 

하나하나 차례로 나타나게 된다.7)

 

                                           * 「삼모하 위노다니(Sammoha-vinodanī)」(『분별론』의 주석서)

                                           * 「앙굿따라 니까야」 A10:61 무명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