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따기리 경은
세존께서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까시를 유행하실 때,
까시에서 사왓티로 향하는 도로에 끼따기리라는 성읍이 있는 바, 여기에 육군비구(六群比丘) 가운데
무리를 거느리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의 본거지였으며, 율장 등에 의하면 신심깊은 청신사가 어떤
비구에게 두 비구의 나쁜 행실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으며, 이를 들은 비구는 세존께 이를 아뢰었고
세존께서는 이들을 경책하기 위해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목갈라나 존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 먹는 것에 대한 제어 _ 밤에 먹는 것을 삼가라
세존께서는 그 즈음에 오후에 먹는 것을 금하는 계율을 정하신 後, 다시 밤에 먹는 것을 삼가라고
계율을 정하신 바, 밧달리 경(M65), 메추라기 비유 경(M66)에서와 같이 비구들은 탁발하면서 얻는
최소한의 즐거움마저 없어지는 것에 대하여 '당황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먹는 것에 대한 제어',,,,,
그러나 세존께서는
"내가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한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밤에 먹는 것을 삼가라."
고 하십니다. 본경을 보면 이전에는 비구들도 하루에 세끼를 먹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이는 인간의 오랜 습속이고 현재까지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오후나, 저녁에 먹는 것을
'때 아닌 때' 먹는 것이라 하시고, 또한 오후나 저녁에 먹지 않을 때 '병이나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문다'고 하시며 제자들도 따르도록 계율로 선포하십니다.
비구 승가가 육체적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좋을지 모르겟습니다만,,,
현대인들에게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오후나 저녁에는 먹는 것을 법으로 허락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가 생각해봅니다. 먹자고 사는 세상인데 '세상이 끝났다'라든가,,, '배고파서 못살겠다.'라든가, '우리를 다 죽일 셈이냐?'라든가,,, '아기들이나 어린 애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부터
모르긴 몰라도 먹는 것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것이 예상됩니다.
과연 사람은 하루에 몇 끼를 먹어야 정상인 것일까요?,,,,,
그러나 세존이시요, 아라한이시요, 정등각자이신 그분은 단 한마디도 틀린 말씀이 없습니다.
그분은 말씀을 거꾸로 해석하면,,, 인간들이 하루에 세 끼씩이나 먹기 때문에
'병이 생기고, 그에 따라 고통이 있고, 무거워지고, 생기가 없게 되며, 편안하게 머묾을 얻지 못한다.'
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해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습니다만,,, 과학적으로 검증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세수 50세에 반열반하셨으니 그 당시의 사람치고는 오래 사신 셈이라 생각됩니다.
그것도 '하루에 한 끼'씩만 드시고, 반열반하실 때까지 전법을 위해서 인도 전역을 유행하셨습니다.
지고하신 분이라 왕이나 장자들이 보시하는 마차나 탈 것을 타고 다니셨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35세 정등각을 이루시고,,, 만 45년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의 평생을 '걸어서' 다니신 것입니다.
일과도 탁발을 나가시면서 걸으시고, 돌아오시면서 걸으시고, 포행을 하시면서 걸으셨습니다.
'하루에 한 끼, 걸어서',,, 이것이 그분의 건강법이라고까지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경에서와 같이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어도
우리는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여기 눈에 보이는 (이익을) 버리고
미래에 얻어질 이익을 추구하겠습니까?
우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을 것입니다."
라고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설득되지도 않는 바, 세존께서 이들을 불러 직접 그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시고, 이들을 훈계하시는 것이 본 경을 설하시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슂지 않은 가르침이요 설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하십니다.
■ 나는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였기 때문에
버려야 할 것은 버리라고 하고, 머물러야 할 것은 머물러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즉 사람이 느끼는 3가지의
모든 느낌에 대해서,
그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각각 어떤 종류의 느낌인가에 따라서
어떤 이는 해로운 법들이 증가하고, 어떤 이는 유익한 법들이 증가하는데,
해로운 법들이 증가하면 세존께서는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유익한 법들이 증가하면 세존께서는 그것을 구족하여 머물러라라고 말씀하시는 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각각의 경우에 그렇게 유익한 법들 혹은 해로운 법들이 증가하는 것을
세존께서 직접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천명하십니다.
앞 부분의 법문과 연계해서 보면,
오후나 저녁에 먹는 것을 삼가할 때 배고픔이라는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그 느낌을 바로 보아 때 아닌 때 먹는 것을 삼가하는 것이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있고, 편안하게 머물게 되는' 것임을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통찰지로 꿰뚫어 체득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시는 것임을 먼저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 7가지 부류의 세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
- 해야할 일을 다한 비구와 해야할 일이 더 이상 없는 비구
세존께서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자들에는 아래 7가지 부류의 인간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1) 양면으로 해탈(兩面解脫)한 자
-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회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팔해탈 내지 구차제주등지의 구족),
- 통찰지로써 번뇌들을 보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한 자
2) 통찰지로 해탈(慧解脫)한 자
-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지는 못하지만,
(팔해탈 내지 구차제주등지는 구족하지 못했지만)
- 통찰지로써 번뇌들을 보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한 자
(※ 세존께서는 초선∼제4선, 공무변처∼식무변처의 3처 어디에서든 츨정하여 통찰지로써
오온을 바로 보아 아라한을 이룰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 M64, 말룽꺄 긴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2328)
3) 몸으로 체험한 자
-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회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여 머물고,
- 통찰지로써 보아 일부 번뇌들을 제거한 자
4) 견해를 얻은 자
-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물지만,
- 통찰지로써 보아 일부 번뇌들을 제거하고,
- 여래가 선언하신 법들을 통찰지로써 잘 보고 바르게 검증하는 자
5) 믿음으로 해탈한 자
-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물지만,
- 통찰지로써 보아 일부 번뇌들을 제거하고,
- 여래에 믿음을 가지고 확고하게 된 자
6) 법을 따르는 자
-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물고,
- 통찰지로써 보지만 아직 번뇌들을 완전하게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 여래가 선언하신 법을 그의 통찰지로 충분히 사유하여 받아들이고, 또한
믿음의 기능(信), 정진의 기능(精進), 마음챙김의 기능(念), 삼매의 기능(定), 통찰지의 기능(慧)의
이런 법을 가지는 자
7) 믿음을 따르는 자
- 물질을 초월한 무색계의 평화로운 해탈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머물고,
- 통찰지로써 보지만 아직 번뇌들을 완전하게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 여래에 대해 충분한 믿음과 사랑이 있고, 또한
믿음의 기능(信), 정진의 기능(精進), 마음챙김의 기능(念), 삼매의 기능(定), 통찰지의 기능(慧)의
이런 법을 가지는 자
세존께서는 위 1) 양면해탈 혹은 2) 혜해탈을 한 경우는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하였고,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상을 실현하엿고,
존재의 족쇄를 부수었고,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라고 하시고
이들이 더 이상 해야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며,
그것은 '그들이이 '방일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방일 힐 수가 없기 때문'
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위 3) 몸으로 체험 한자 ∼7) 믿음을 따르는 자의 경우에는
1) 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2) 선우(善友)들을 섬기면서, 3) 기능(五根)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으며, 이들에게서 '이러한 불방일의 열매를 보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고
해야할 일이 있다.'고 말씀한다고 설하셨습니다.
■ 구경의 지혜는 '순차적인' 공부지음, 실천, 도닦음으로 이루어진다.(13단계)
이같이 설하신 후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나는 구경의 지혜가 단박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1) 순차적인 공부지음과, 2) 순차적인 실천, 3) 순차적인 도닦음으로
구경의 지혜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고 천명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순차적으로 공부짓고, 순차적으로 실천하고, 순차적으로 도닦아' 구경의 지혜를 이루는지
아래와 같이 13단계로 나누어서 설하십니다.
1) 그는 스승에 믿음을 가진다.
2) 믿음을 가지기에 스승을 친견한다.
3) 친견하면서 스승을 공경한다.
4) 공경하기에 귀를 기울인다.
5) 귀 기울이기에 법을 배운다.
6) 법을 배웠기에 법을 호지한다.
7) 호지하기에 법들의 뜻을 자세히 살펴 본다.
8) 법들의 뜻을 자세히 살필 때에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인다.
9)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였기에 열의가 생긴다.
10) 열의가 생기기에 시도한다.
11) 시도할 때 세밀하게 조사한다.
12) 세밀하게 조사한 뒤 노력한다.
13) 노력할 때,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그것을 꿰뚫어 본다.
의 13가지 단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승에 믿음이 없는 자가 친견하지 않습니다. 친견하더라도 공경하지 않습니다.
공경하지 않는 자가 스승에 귀 기울일 이유가 없습니다.
귀 기울이지 않는 자는 법을 들어도 그것이 법인 줄 모릅니다.
그렇게 법을 배운자는 법을 호지하지 않습니다.
법을 마음에 새겨 호지하지 않는 자는 그 법의 뜻을 살펴보지 않습니다.
법의 뜻을 살펴보지 않기에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어떤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런 그렇게 들은 법을 실현할 열의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진실한 열의가 없으므로,,, 그는 그 법을 진실하게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얻은 법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배운 것을 자기의 것으로 체화하는 노력과 실참수행에서만 체득되는
말로는 전하기 어려운 세밀함과 실전이 모두 결여됩니다.
그는 말로만 아는 것이 되고, 해보라면 할 수 없으며, 더욱 자세히 설명해보라면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일종의 취미생활이나 호사가로서 법을 배우는 것이며,
잘 해야 '앵무새'가 되는 것입니다. 잘 해야 '남의 밭의 소를 세는' 모양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그는 진리를 듣기는 들었지만,,,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것을 실현할 일도,,, 통찰지로써 최상의 진리를 꿰뚫어 볼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길을 잃어버리고, 그릇된 도를 닦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그 시작이 '스승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점, 그리고 이 법문의 바로 전에 세존께서
7부류의 인간을 설하실 때 양면해탈한 자로부터 시작하여 그 마지막이 7부류의 인간들의 시작이
되는'맏음을 따르는 자'라는 것을 돌아볼 칠요가 있습니다.
그가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부처님의 교법을 따라가기 시작하는 시작점은 부처님의 교범에 대한
'청정함 믿음'이 그 첫단추이기 때문입니다.
■ 두 비구를 경책하심
세존께서는 이같이 설하시고 세존께서 계율을 정하심에도 불구하고 저녀그 아침, 오후에도 계속
먹을 것을 주장하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라는 두 비구에게
그대들은 바로 이같이
'1) 믿음이, 2) 친견이, 3) 공경이, 4) 귀 기울임이, 5) 법을 들음이, 6) 법을 호지함이,
7) 법의 뜻을 자세히 살펴 봄이, 8)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임이,
9) 열의가, 10) 시도가, 11) 세밀한 조사가, 12) 노력이 없었다.'라고,
" 그대들은 길을 잃었고, 그릇된 도를 닦았다.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이 법과 율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고 얼마나 잘못 들어섰던가?"
라고 그들을 경책하십니다.
■ 부처님의 교법에 믿음을 가진 제자의 법다운 정진과 결과
세존께서는 이들에게
"네 구절로 된 진리가 있나니,
그것을 암송할 때
지자는 오래지 않아 통찰지로 그 뜻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대들을 위해 암송하리라.
이것을 잘 이해하도록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네 구절로 된 진리(catu-ppada veyyakarana)'라 함은 주석에 의해도 시성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첫째는 여기서 '사성제'의 가르침을 꺼내시는 세존의 가르침으로 볼 때 '사성제'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놀란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법문을 설하시든 그분의 마음 속에는 항상
사성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사성제의 가르침을 '암송하라. 그러면 머지않아 그 뜻을 잘 알게 되리라.'라는 세존의 가르침의 방법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성제이기에 우리가 암송해야할 유일한 법문이
있다면 바로 그것은 사성제의 법문입니다. 또한 호지하여 끝없이 암송하면,, 그 뜻을 이해하게 된다는
세존의 가르침도 놀랍고도 간곡한 가르침이라고 생각됩니다.
(※ 사성제: http://blog.daum.net/ibakdal/17372370)
이렇게 말씀하시자 두 비구듫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저희들이 누구라고 그 법을 이해하겠습니까?"
라고 발뺌을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들에게 화를 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세속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주면 이렇게 하고 주지 않으면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흥정을 해서는
안되는데,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여래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느냐?'고
나무라십니다.
사성제를 설하시는 대신에 그들에 대해 세존께서는
법을 배우는 제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세존은 스승이시고, 나는 제자이다.
세존께서는 아시고,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피부와 힘줄과 뼈가 쇠약해지고
몸에 살점과 피가 마르더라도
남자다운 근력과 남자다운 노력과 남자다운 분발로써
얻어야 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정진을 계속하리라.'라고.
이같이 스승의 교법에 믿음을 가진 제자가 법을 통찰하여 취할 때
두 가지 결실 가운데 한 가지 결실을 얻나니,
'바로 지금·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증득하거나
만일 취착이 남아 있다면 불환자가 된다.'라고.
이와 같이 설하셨습니다.
이같이 새겼습니다.
이같이 상세한 법문을 해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
시작을 모르는 과거로부터 윤회하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가르침, 승가,
부모님, 스승님,
저보다 공덕이나 나이가 많은 분들께,
혹은 이때까지 저와 인연이 닿았던 천신들, 비인간들, 사람들,
축생들, 혹은 미물의 몸을 입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제가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하여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잘못한 것들,,, 수미산처럼 많이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예경드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또한 다른 이들이
저에게 범한 잘못들도
때를 벗은 선한 이들의 마음으로 다 용서합니다.
마음 속 깊이 박힌 적대와 악의와 잔인할 수 있음과 비난의 쇠살들 모두 뽑아버립니다.
본경을 사경한 공덕 몫을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처와 제 가족들에게, 곤경과 속박을 건너려는 저 자신에게,,,,
저를 지켜보고 도우시려는 모든 천신들과 비인간들에게,,,,
어려울 때 도움을 주신 친척, 친구들, 도반들께
경를 번역하시느라 노고를 마다 않으신 대림스님과 각묵스님,
장유 반룡산과 지리산 실상사와 지리산, 설악산 그리고 보라산에, 그리고 영천의 식진암에 계시는
모든 천신들과 용들과 비인간들에게,,,
우 또다나 사야도와 일창스님께,,,
새로이 인연을 맺게된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법과 그 제자들을 보호하는 천신들을 시작으로
31천 거주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들께
부처님의 법을 따라 행복과 평안을 얻으시기를,,,
이 회향으로도 큰 힘을 얻으시기를,,,
장애없이 닙바나 이르시기를 염원하면서,,,,
회향합니다.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2017.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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