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짜가 긴 경은
세존께서 웨살리에서 큰 숲의 중각강당에 머무실 때
니간타의 후예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냉소적이며, 세존께 무례하고 비방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족성이 악기웨사나인 삿짜까라는 논객의 힐난에 답하여 설하신 경입니다.
본경의 주석서에는 세존께서는 이 삿짜까에게 앞의 삿짜까 짧은 경을 포함하여 두 개의 경을
설하셨는데, 삿짜까는 진리를 관통하거나 증득하지도 못했고, 교단에 출가하지도, 삼보에 귀의하지도 않았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법을 설하셨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읍니다.
세존께서는 '이 사람이 지금은 강한 의지가 없다. 그러나 내가 열반에 든 지 200년이 지난 후
땀바빤니 섬(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될 것인데, 그곳에서 이 사람은 장자의 집에 태어나서
시절인연이 도래할 때 출가하여 삼장을 배워 위빳사나를 증장시켜 무애해를 겸한 아라한과를 얻어서
깔라붓다락키따라는 이름의 번뇌 다한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시고 미래의 영향력 때문에 가르침을 설하셨다."(MA.ii.293)라는 설명이 그것입니다.
세존의 깨달음과 그 가르침에 대해서 세존의 면전에서 공박하고 논란하는 삿짜까의 태도는
앞서 '오온이 내가 아님'을 공방하는「삿짜가 짧은 경」(M35)과 더불어, 실제 요즘의 세상에 있어서도 세존의 가르침을 두고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양상과도 매우 비슷해 보입니다.
삿짜까의 저열하지만 현란한 억지를 교계하기 위해서 펴신 이 가르침은 그러한 논리를 제압하시는
세존의 압도적이고 여법한 논리의 전개와 더불어, 그러한 전개와 함께 다른 경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요긴한 가르침이 함께 전개되는 것이어서 그 뜻을 쉽게 꿰뚫어 알기 어려웠습니다.
1. 삿짜까의 주장 (1) - 세존의 제자들은 마음 닦기에만 몰두하여 몸을 닦지 않는다.
ㅇ 삿짜까의 주장
삿짜까는
- 몸이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마음이 몸의 지배하에 놓이는 바, 이는 마음을 닦지 못한 때문이고,
- 마음이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몸이 마음의 지배하에 놓이는 바, 이는 몸을 닦지 못한 때문인데,
- 세존의 제자들은 마음닦기에만 몰두하여 몸을 닦지 않는다.
(즉, 몸을 닦지 않으므로 마음이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몸이 마음의 지배하애 놓이는 경우일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ㅇ 궤변을 깨기 어려움
- 삿짜까는 스스로 마음을 닦음 혹은 몸을 닦음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세워 놓고 그러한 전개하에
일말 결론에 도달하여 그것으로 세존의 제자들을 공박합니다.
- 느낌에는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겠는데,
그는 괴로운 느낌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논객의 이와 같은 그럴듯하지만 엉망진창인 류(類)의 공박이야말로 대응하기도 설득하기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ㅇ 세존: 세밀한 반론 & 용어의 정의부터 다시
세존께서는 삿짜까에게
- '그대는 어떤 것이 몸을 닦는 것이라고 들었는가?'라고 물으시고,
삿짜까가 나체수행자들의 고행을 몸을 닦는 것으로 말하자
그들은 실제 그렇게만 사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그렇게 고행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버린다고
지적하시어, 그런 고행을 두고 몸을 닦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성립하기 어려움을 지적하십니다.
- 또한 '그대는 어떤 것이 마음을 닦는다라고 들었는가?'라고 물으시어,
삿짜까가 이에 대해 답하지 못하자, 자신의 앎을 한계로 희론의 결과로 '마음 닦음'을 운운하였지만
그 실체가 없음을 지적하십니다.
- 하여 세존께서는 삿짜까가 말하는 몸을 닦음이란 성자의 율에서는 법다운 수행이 아니며,
또한 그대는 몸을 닦음을 모르는데 하물며 마음 닦음을 어찌 알겠느냐라고 지적하시며
삿짜까가 세운 몸과 마음 닦음이라는 희론적 정의를 무너뜨리십니다.
ㅇ 세존: 법다운 몸 닦음과 마음 닦음
세존께서는
- 범부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면, 그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고 지속되길 갈망하고,
다시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는 바,
·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이것이 그의 마음을 제압하며 머무르게 되는 것은
그가 몸을 닦지 않은 때문이요
(몸의 감각기관으로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내가 아님을 꿰뚫어 보는 수행,
즉, 몸에 대한 수행이 덜 됨이요)
·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이것이 그의 마음을 제압하며 머무르게 되는 것은
그가 마음을 닦지 않은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마음, 혹은 알음알이가 위빳사나의 지혜가 투철하고 영글어, 몸에서 일어난 괴로운
느낌을 그 역시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내가 아닌 줄 분명히 알아 그 괴로운 느낌을 제압할 만큼의
마음의 수행이 덜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 그러나 반대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 몸을 닦았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도 그 즐거운 느낌이 마음을 제압하여 머물지 않고
·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도 그 괴로운 느낌이 마음을 제압하여 머물지 않음
을 말씀하십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그것이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그 느낌에 의해서 마음이 제압당하지
않는 수행을 말씀하고 계시고, 이것을 두고 몸을 닦고 마음을 닦는 자라고 천명하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현세에도 여러 사람들이 몸을 닦음과 마음 닦음을 천명하고 있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천명하거나 권유하는 바,
이 몸은 궁극에는 무엇을 수행하든 무너지고 소멸하고, 그 마음이란 것은 실체가 없고
자기 앞에 드러난 대상을 두고 끝없이 찰나생 찰나멸을 거듭하며 흘러갈 뿐인 것을 보면,
세존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제압하고 머물고 광란하게 하는 그 모든 '느낌(受)'에
대하여 그 본질을 지혜로 꿰뚫어 보고 알아, '그 느낌에 마음이 지배당하지 않는' 수행을 하는 것
이외에 궁극적 유익함이라는 의미에서의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라는 놀라운
가르침을 설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삿짜까의 주장 (2) - 세존께서는 정말 느낌이 마음을 지배한 적이 없단 말입니까?
위와 같이 말씀하시고 세존께서는
'내가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한 이후
이미 일어난 즐거운 느낌이 마음을 제압하여 머물거나, 혹은 이미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내 마음을 제압하면서 머무는 그런 경우란 없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삿짜까는 다시 다른 도발을 하는 바,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마음을 제압하여 머물만큼 그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 세존께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싯짜까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단히
당돌한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 ^;;)
이것으로 다음 세존의 법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왜 내게 그런 느낌이 일어나지 않았겠느냐라고 반문하시면서,
출가 이래로 어떠한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 어떤 계기로 일어났고
당신께서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느낌에 의해서 마음이 지배당하지 않았는지를 순서대로 상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이어지는 법문입니다.
1)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느낌에 머물지 않으심
세존께서는 출가하신 後 먼저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로부터 순서대로 각각 무소유처
선정과 비상비비상처 선정을 배우고 증득하셨음을 밝히십니다.
그것은 일종 일시적인 해탈일 것이기도 했겠습니다만, 세존께서는 그러한 선정의 증득이 결국
하나의 선정으로서의 머묾일 뿐이고 그러한 증득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든 각각 그 얻은 바
선정에 의한 세상 즉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고
그것으로는 당신깨 원하시는 바 위없는 유가안은을 얻을 수 없음을 아시고 그 법들을 '염오하면서'
떠나가십니다.
그러한 가르침으로는 결국 염오로, 탐욕의 빛바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최상의 지혜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지혜의 발현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 지헤의 발현: 감각적 욕망을 속속들이 떨쳐버리지 못한 자가
느낌에 지배당하는 것을 과연 벗어날 수 있는가?
곧 부처를 이루실 이 위없는 수행자 보살께서는 참으로 대영웅답게 위와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떠나서 우루웰라의 장군촌에 이르러 이제 다섯 비구와 함께
고행을 시작하시기 전의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여기서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세 가지 비유가 당신에게 떠올랐다라고 하시고
이래의 비유를 하십니다.
1) 물위에 떠있는 나무 토막,
2) 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물에 젖은 나무 토막,
3) 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물기 없는 장작
에 각각 불을 지피는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각 나무 토막은 아래를 각각 비유하신 것인 바, 그 의미는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1) 물에 떠 있는 나무 토막
- 감각적 욕망을 멀리 떨쳐버리지 못한 채 머무르거나,
- 안으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망, 애착, 홀림, 갈등, 열병을 잘 제거히지 못하고 가라앉히지 못한 자
2)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바닥에 있으나, 물에 젖은 나무 토막
- 비록 몸, 혹은 겉으로는 감각적 욕망을 멀리 떨쳐버린 것처럼 보이나,
- 안으로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망, 애착, 홀림, 갈등, 열병을 잘 제거히지 못하고 가라앉히지
못한 자
3) 물에서 멀리 떨어진 땅바닥에 있으며, 물기 없는 마른 장작
-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각적 욕망을 멀리 떨쳐 버린 채 머물고,
- 속속들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망, 애착, 홀림, 갈등, 열병을 잘 제거히고 가라앉힌 자
가 각각 그 비유하신 바의 의미입니다.
세존께서는 위 1), 2)의 경우에는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을 느끼더라도,
혹은 느끼지 않더라도 지와 견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결국 감각적 욕망에 이끌림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다시금 그러한 원인을 짓게 되므로)
그러나 위 3)의 경우에는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을 느끼더라도,
혹은 느끼지 않더라도 지와 견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감각적 욕망를 바로 보아 오온에 대한 취착을 벗어나 있으므로 그러한 원인을 계속 지어 열반으로
나아가므로)
결국 그가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렸는가?'의 여부에 따라 지와 견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열쇠가 됨을 천명하십니다.
ㅇ 왜 여기서 갑자기 이같은 비유를 하시는가? _ 대영웅의 질문과 답을 구함
이 다음의 법문은 세존께서 극심한 고행에 따른 몸의 괴로운 느낌에도 마음이 제압당하지
않으신 것, 4선정과 삼명, 그리고 열반에 이르러서도 그 즐거운 느낌에 마음이 제압당하지 않으신
것으로 이어집니다.
제 생각은 아래와 같습니다.
대영웅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첫 일성으로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짓는 자가 누군지 알기위해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괴로움이었네.
아! 집 짓는 자여! 나 이제 그댈 보았나니,
그대 더 이상 집 짓지 못하리.
이제 그대의 모든 서까래는 부셔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러
갈애의 부숴짐을 성취하였다."
(법구경 153~154)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이 일구(一句)야 말로 대영웅께서는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향하여
예까지 오신 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집 짓는 자'가 누군지, 왜 끊임없이 집이 지어지는지, 즉 나를 포함한 이 모든 것은 대체 무엇인지, 왜 그런 지를 꿰뚫어 아는 것이었습니다.
세존께서는 디팡카라 부처님이 계실 때 붓다가 되기를 서원하시고, 4아승지 10만대겁을 십바라밀을
구족하게 닦으시고 당세를 마지막 생으로 인간에 태어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분이십니다.
이분께서 '느낌'에 마음이 지배당하지 않는 것을 설하시면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망, 애착, 홀림, 갈등, 열병'을 멀리 속속들이 떨쳐버려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은
'집짓는 자가 누구인가?'와 같은 그분이 가지셨던 궁극적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왜 갑자기 이 장면에서 저러한 말씀을 꺼내시는 것인지, 그전에 무슨 배경이 있어서 그때 그런 세 가지 비유가 생각난 것인지, 그리고 이어지는 법문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집, 이 모든 것은,
감관을 지닌 나와 그 대상인 세상(色, form)) 사이에, 감각접촉(觸)을 통해 일어나는
인지(想, perception)와 해석(行, formation)을 통해 얻게된 알음알이(識, consciousness)가 바로
그것이며, 이것말고는 어떤 존재에게든 나와 세상 혹은 이 모든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가르침 또한 세존으로부터 듣고 배웠습니다. 5온 12처 18계를 떠나서 존재란 세계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이치를 벗어나 자신이나 세상를 자각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자신이 물고기로 태어난 이상은 자신이 물에 살고 있음을 알지 못하듯, 참으로 어려운 것이며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또한
그러하기에 모든 존재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나온 굴레며 족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생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시고 '다시는 태어남이 없는, 늙음이 없는, 병듦이 없는, 죽음이 없는, 오염이 없는 유가안은인 열반'을 구하신 것이며, 혹은
존재로부터의 자유를 구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이 모든 것은 설명됩니다. 그래야만 그로써 존재와 삶의 정당한 이유가 성립됩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고, 참으로 찾기 어려운 답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이루는 나와 세상의 존재 혹은 전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러한 존재형식, 존재의 다발, 혹은 존재의 다섯 무더기(五蘊)의 전개가 일어나는 과정을 천착하여 꿰뚫어 알지 못하면 그러한 메카니즘을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을 더할 나위없이 세밀하고 투철하게 보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러한 도리를 깨달으시고 증득하신 후에 이것을 연민의 마음으로 삼계에 천명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로부터의 자유 즉 존재형식을 벗어남의 첫 번째 열쇠는 바로 '느낌'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는 '나'와 '세상' 간의 '감각접촉'이 일어날 때 '느낌'이 일어납니다.
나와 세상이라는 것의 '장막을 벗겨'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그 '느낌'이 일어나는 과정과 일어난
'느낌'이라는 것의 실체를 마음챙겨서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 존재라는
굴레에서 순차적으로 자동적으로 빈틈없이 진행되는 메카니즘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바로 보아 벗어나지 않으면 그는 그에게 씌워진 굴레나 족쇄를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 '느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함은 커녕 그것이 즐거운 것이면 '그 느낌'을 갈망하고, '그 느낌'이
괴로운 것이면 그것을 벗어나고자 광란하는 것 즉 느낌에 예속되어 매 순간 살아가는 것이 일상적인 존재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느낌'에 온전히 압도되고 예속되어 삽니다. 단 한순간도 느낌에서
벗어난 삶을 살려고 시도하지조차 않습니다. 기실 그런 이상한 시도를 해야 할 이유를 아직
발견하지 못합니다. 느낌은 오히려 그 무엇보다 존중받습니다.
세존께서는 여기서 범부가 느낌에 예속되는 것이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것이라고
그 강력한 연결고리를 규명하고 천명하고 계십니다.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끼는 것에 대한 욕망을 '멀리 떨쳐버리고' 머물고, 자신을 아무리 살펴뵈도
그러한 것에 대한 '욕망, 애착, 홀림, 갈등, 열병'조차가 속속들이 잘 제거되고 잘 가라앉혀져
실체적으로 그런 마음챙김이 확립된 연후에야 느낌에 의해서 지배당하지 않는 자가 되며,
다시 그런 연후에야 그는 비로소 지와 견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천명하십니다.
이와 같이 김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린 자라야만 느낌에 의해 몸과 마음이 제압당하지 않게 되는 크나큰 도리를 설하신 것이며, 그와 같이 몸을 닦은 자가, 마음을 닦은 자가 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느낌(受)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에 깔려있는 바탕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실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린 자가 되지 못하면, 마치 물에 젖은 나무토막의 비유와 같이,
그가 혹독한 느낌을 당하던, 당하지 않고 즐거운 느낌만을 느끼든 그는 언제든 다시금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고 그것 즉 느낌(受, feel) 내지 그에 따라 펼쳐지는 인지(想, perception), 심리현상(行. formation), 인식(識, 알음알이, consciousness)라는 미망의 세계에 묶인 채로 길을 갈 것이므로 그에게
윤회의 길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매여, 있는 그대로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고, 그리하여 그의 전향하는 마음이 항상
느낌을 추구하고, 그리하여 대상(色, form) 집착하는 한, 그가 일시적으로는 어떤 것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는 결국 느낌에 압도당하는 삶을 결코 면할 수 없습니다. 그가 나와 세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을 멀리 떨쳐버리고 매순간 일어나는 '느낌'을 꿰뚫어 보고 단속하지 않으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느낌에 마음챙김을 확립(受隨觀)'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은 결코 과장도 오역도 아닐 것입니다.
참으로 미세하고, 소소하고, 사소한,,,, 전광석화보다도 더 빨라야 하는,,, (느낌이란 그러하기에)
지난한 노력과 쉼없는 정진을 필요로 하는,,,,,
수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 가지 나무토막의 비유는 이와 같은 실로 중차대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더불어서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를 떠나신 연후라 세존과 같으신 분이 왜 그 시점에 그러한 선정을 떠나셨는지에 대한 설명도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라는 지고한 무색계의
선정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그 선정에 머물러 있을 때만 가능한 '느낌' 내지 그것이 빚어내는
또 한 개의 세상으로 귀결된 것에 불과하여, 결국 일어나고 사라짐을 면할 수 없는 것일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분은 그런 것을 구하려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 류(類)가 아닌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리는',,,
그래서 더 이상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된, 그 모든 것의 답과 이유를 찾으려
하셨던 것입니다. 범부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에 대한 답이요, 일체의 족쇄를 풀어 일체 중생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이요,
그러므로 그것은 일체 중생이 괴로움을 벗어나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칠각지과 두타행을 제외하고
감각기능의 단속을 제외하고
모든 것 놓아버림을 제외하고
생명들의 행복을 나는 보지 못하노라."
(* 수브라흐마 게송, 제2상윳따 17번째 게송)
2) 괴로운 느낌이 내 마음을 제압한 적이 없었다.
_ 불굴의 정진과 마음챙김 때문에
- 마음으로 마음을 압박하고 제압하여 항복시키실 때 괴로운 느낌
· 겨드랑이에 땀이 날 정도로
- 숨을 쉬지 않는 선(禪)을 닦으실 때
· 귓구멍에서 굉음이 나는 괴로움
· 거센 바람이 머리를 내리치는 괴로움
· 머리에 심한 두통이 나는 괴로움
· 거센 바람이 배를 도려내는 괴로움
· 몸에 큰 불이 붙는 듯한 괴로움
- 아주 적은 양의 음식만을 먹고 수행하실 때
· 사지가 풀 마디처럼 마르고
· 엉덩이가 낙타의 발처럼 되고
· 등뼈가 줄로 엮어둔 구슬처럼
· 갈빗대가 허물어지고 부서지고
· 동공이 깊이 들어가고
· 머리가죽이 시들고
· 뱃가죽은 등뼈와 달라붙고
· 대변이나 소변을 보려면 꼬꾸라지고
· 사지를 문지르면 썩은 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괴로움
예를 들면 그와 같이 괴거, 미래, 현재의 어떤 사문·바라문이 어떠한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이보다 더한 것은 없는 가장 지독한 '괴로움 느낌'을 느끼셨으나
그 괴로운 느낌이 세존의 마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왜 그러한가? 그러한 고통스러운 용맹정진으로 인해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지만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 중도에 대한 지헤의 반조: 깨달음을 위한 다른 길이 없을까?
세존께서는 위와 같은 극심한 고행에도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지 못하시자 '깨달음을 얻을 다른 길은 없을까?'라고 사유하십니다.
도대체 이분이 얻고자 하셨던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이란
무엇이었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 고행을 하시면서도 그것을 잊지않으시고 정진하신 것이 분명
합니다.
역시 그것은 '집짓는 자가 누구인지' 찾으시는 것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이 모든 것에 대한
답과 그 이유입니다. 고행으로는 그것을 찾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 같으면 자신이 공을 들였으나 실패한 사례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영웅께서는
그것을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것도 놀라운 부분입니다.
세존께서는 어렸을 때 삭까족이 농경제 의식을 거행할 때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 piiti]과 행복[樂, sukha]이 있는'
초선에 드셨던 기억을 하시고, '혹시 그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시고,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지혜를 발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극도로 여읜 몸을 가지고 그런 행복을 얻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하시고 고행의 길을
돌이키셔서 비로소 덩어리 진 음식을 드시기로 하십니다.
이 부분 또한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무려 6년의 고행을 하시고 그것을 돌이켜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새로 방향을 잡으신 것이 당신께서 어렸을 적에 이미 경험했던 초선이라는 것, 또
그것을 숨기시지 않으시는 것도 놀랍고, 이러한 위없는 성인께서도 이같은 시행착오를 하시는구나
라는 것, 그 또한 숨기지 않으시는 것, 그 모든 것이 놀랍습니다.
세존께서는 그같이 초선을 상기하시고 그 길로 나아가기로 하시면서
'이 행복은
감각적인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데,
그것을 내가 왜 두려워하는가?
나는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그런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그 방향으로 가시기로 한 이유를 설하십니다.
감각적 욕망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그 길이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븐명히 열려있는데
가시지 않은 남은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들이 간 길을 확인하고 검증하고
스스로 전에 가봤던 길이라도 다시 검증하여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대영웅께도 이렇게 어려운 길이구나라는 생각에 참으로 숙연해지는 장면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초선(初禪)이 무엇이관대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지혜를 발현하신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세존의 이 곡절이 있는 요긴한 가르침은 그저 어떤 수행자는 그러했다라는 이야기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세존께서 가신 길이기에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고행을 접으신 이유는 「사자후의 긴 경」(M12)에서 설하신 바와 같이
"사리뿟따여,
나는 참으로 그러한 행위와, 그러한 도닦음과, 그러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知)와 견(見)의 특별함을 증득하지 못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성스러운 통찰지를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통찰지를 증득하면
성스러운 해탈로 인도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자를 바르게 괴로움의 멸진으로 인도한다."
와 같이 고행을 한다고 해서 '성스러운 통찰지'를 증득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갑자기 초선에서 깨달음의 길을 보시는 것은 과연 도약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제게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성스러운 통찰지를
증득하기 위해서' 초선의 길로 전환하셨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논리적인 귀결일 것입니다.
문제는 초선(jhana)과 성스러운 통찰지(panna)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무량겁 십바라밀을 구족하신 공덕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한 닦음으로 다른 이들이
돌보아야 할 어린 아이이실 때도 스스로 초선을 구족하여 머물 수 있던 분이십니다. 출가하셔서는
무소유처나 비상비비상처의 무색계 선정도 쉽게 증득하시는 분입니다. 세존께서는 극심한 고행 속에서도 그 괴로운 느낌이 마음을 제압하여 머문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세존께서는 몸이 무너져가는
그러한 혹독함 속에서도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다'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종합해보면 세존께서는 이미 마음을 완전히 조복 받으신 것이고, 삼매(心一傾)의 자유자재를 얻으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범인의 상상의 지경을 넘어버리신 것입니다. 이같은 분이 고행으로는 통찰지를 얻거나 생기지 않는다고 스스로 검증하시고 드디어 다른 길을 모색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집짓는 자가 누구인지' 즉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과 그 이유에 접근할 수 있는 지혜 즉 '성스러운 통찰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말이 됩니다.
이 부분은 본경의 주된 가르침과 여전히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 '느낌'에 마음이 지배당하는 자가 되지 마라,
- 그렇게 느낌에 지배당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선결조건이 있다.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려라.
라는 두 가지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세존께서 여기 '초선'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 초선은 위의 가르침과 같이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린 자' 만이 증득할 수 있는 선정입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신 분이셨고 그러하기에 이미 느낌에 마음을 지배
당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입니다.
- 세존께서는 이때 이미 마음을 완전히 항복받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삼매이든
미음집중을 자유자재로 하실 만큼 그 마음을 조복받으신 분이셨습니다.
그 다음 그러한 초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스러운 통찰지'로는 어떻게 넘어가는 것입니까?
1)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셨고,
2) 그리하여 그것이 괴로운 느낌이든 즐거운 느낌이든 그 느낌에 의해서 마음이 지배당하지 않으시고,
3) 마음을 완전하게 제어, 집중하실 수 있는 그분께서,
몸을 괴롭히고 건강하게 몸을 유지하는 것초자도 제어하는 고행으로는 지혜(panna)를 얻을 수 없음을 검증하신 후, 비로소 덩어리진 음식을 드시고,
그 조련된 마음의 힘으로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감각기관으로부터 오온에 대한 성찰을 시작하셨다
라고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감히 부처님의 사유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렇지 않고는
저로서는 이러한 곡절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즐거운 느낌이 내 마음을 지배한 적이 없었다
_ 열반의 즐거운 느낌조차도
이어서 세존께서는 삿짜까에게 괴로운 느낌에 이어서, 즐거운 느낌이 당신에게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해서 그 느낌에 의해서 마음이 지배당하지 않으셨는지를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 초선∼4선(jhana)의 즐거운 느낌
-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 즉 삼명(vijjaa)의 즐거운 느낌
도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지배하지는 못했다라고 천명하시는 부분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천명 가운데 놀라운 것은 누진통 즉 해탈, 열반에 따르는 즐거운 느낌조차도
세존의 마음을 제압하고 지배하지는 못했다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맛지마니까야 제1경인 「뿌리에 대한 법문」에서
"그는
열반을 열반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안다.
열반을 열반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알아
1) (자신을) 열반이라 생각하지 않고,
2) (자신을) 열반에서 생각하지 않고,
3) (자신을) 열반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4) 열반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열반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을 상기하게 합니다.
그러면 그로부터는 어떻게 합니까? 세존께서는
특별히 누구한테만 법을 설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공평하게 법을 설하시며
즉 삿짜까가 세존을 힐난하므로 삿짜까에게만 이런 법을 특별하게 설하시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같은 법을 설하시는 것이며,
"설법을 마치고 나면
나는 항상 머무는 이전의 삼매의 표상에
안으로 마음을 확립하고 고요하게 하고 전일하게 하고 집중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반에 이르신 분의 평소의 머묾이 어떤지를 밝혀주시는 소중한 법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삿짜까의 주장 (3) - 그렇다면 세존께서 낮잠을 주무신 것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에 삿짜까는 세존께서 힌 때 탁발공양 후에 낮잠을 주무신 일으르 두고
이것이 '미혹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세존께 묻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존께서 그런 수행을 하시고, 느낌에 마음을 지배받지 않으신 분이고,
그렇게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면 어떻게 낮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말로만 그러하신
것이고, 이런 것이야말로 실은 미혹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닙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세존께서는 담담하게 그때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잠을 잤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두고 미혹하다거나 미혹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존께서는
'누구든지 그가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를 모두 제거하지 못했다면
그를 나는 미혹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시며, 하지만 그가 누구라도 그러한 번뇌를 모두 제거했다면 그를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며 삿짜까를 가르치십니다.
또한 세존께서는
"여래는
정신적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두렵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했다.
악기웨사나여, 예를 들면
야자수가 그 윗부분이 잘리면 다시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이라고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치십니다.
이 법문 끝에 논객 삿짜까는 자신이 무례하고 비방하는 조의 말투로 세존께 대했음에도
세존의 피부색은 깨끗한 그대로요 안색도 밝은 그대로여서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다르며 과연
아라한·정등각자에 어울리신다고 말씀을 올리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 본 경의 내용입니다.
일체 세상사 혹은 일체 느낌에 동요하시지 않는 그분 여래께서는 과연 어떤 분이셨는지 일면을
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니간타의 후예인 논객 삿짜까는 총명이 없었던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태도는 자신의 아는 것에 가둬져 무례하고 건방진 것이었지만,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세존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그것을 납득할 수는 있는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석서를 따르면 그는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200년이 지나 스리랑카에 태어나서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됩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그가 이 법문을 듣는 자리에서 그는 기실 그 법문의 듯을 다 안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가 논리적인 사람이고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기에 세존의 가르침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많은 세월이 지나서는 비로소 세존의 말씀과 그 뜻을 깊이 궁구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세존의 가르침을 새기면서 다음 생에는 꼭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완성하겠다는 다짐을 절절하게 세웠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연후에 그 원을 그렇게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이것은 그가 지은 공덕에 따른 것이라고도 보아지지만,,
세존께서 이 세 가지의 비유라든가, 고행에서 초선으로의 전환이라든가와 같이, 삿짜까의 당돌함에서 나온 간명한 답변이기도 합니다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기실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어려운 법문을 삿짜까에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하고 풀기위해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그는 서서히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를 알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세존께서는 그의 그릇을 보고,,, 그에게 걸맞는 숙제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경을 마치며 경(經)을 공부하고 있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는 제 모습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느낌에 마음이 지배받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하여는,,,
그 마음가짐이나 수행이 얼마나 소소하고 사소한 데까지 미치고,,, (느낌을 보아야 하기에,,,)
얼마나 마음챙김이 굳건하고 속행이 빨라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 '느낌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가 되어보겠다고 서원을 세웁니다.
- 소소한 것으로부터 마음챙겨서 '자애의 마음을 놓지 않는 자'가 '적의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서원을 세웁니다.
기실 이런 정도가 안되면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새겼습니다.
이같은 상세한 법문을 해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거룩하신 승가에 귀의합니다.
신변과 가족의 번다한 문제들을 겪으면서, 또한 제 부족함을 다시 한 번 성찰하면서,,,
본경의 사경을 시작하여 마치는데 근 한 달이 걸렸습니다.
이 삿짜까 긴 경은 제 나름으로는 그 뜻을 꿰뚫어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보기와는 다른 것입니다.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과 역본에 따라서 해석이나 이해가 달라지는 어려움도 한 몫을 했습니다.
가야할 먼 길을 보면서,,,, 다시금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제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변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느낌에 따라서 펼쳐지는 세상이요 그렇게 알더라도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 진정코 어렵습니다.
이 경을 사경한 공덕 몫을
야다나에게, 야다나바투에게, 야다나마따에게, 부모님께 회향합니다.
또한 31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존재에게 회향합니다.
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위험에서 벗어나시기를,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가르침과 같이 느낌에 마음을 지배받지 않는 분들이 되셔서 장애없이 닙바나에 이르시기를,,,,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201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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