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32.고싱가살라긴경-수행의 끝

※ 아비담마는 부처님의 직설인가?

이르머꼬어리서근 2016. 11. 6. 16:47

 

1. 「고싱가살라 긴 경」(M32)에서의 '아비담마'

 

본 「고싱가살라 긴 경」을 보면,

마하목갈라나 존자께서 어떤 비구가 고싱가살라 숲를 빛나게 하는가라는 사리뿟따 존자의

물음에 대해서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 두 비구가 있어

    아비담마에 대해 논의를 하는데

    그들은 서로에게 질문을 하고 각자 받은 질문에 대답하여 그칠 줄을 모르고

    그들의 대화는 법에 근거하여 계속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이런 비구가 고싱가살라 숲을 빛나게 합니다."

 

라고 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고, (http://blog.daum.net/ibakdal/17371997)

 

 

나중에 세존께서는 마하목갈라나 존자의 이같은 대답에 대하여,

 

   "장하구나. 장하구나, 사리뿟따여.

    마하목갈라나가 그것을 바르게 설명하면서 그가 했던 대로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리뿟따여,

    마하목갈라나는

 

    참으로 법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http://blog.daum.net/ibakdal/17371998)

 

 

 

2. 대림스님의 주석

 

'아비담마에 대한 논의'는 abhidhamma--katha'(더 높은 법에 대한 논의)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아비담마에 대한 논의를 하는 자에게는

 

미세한  

 

여러 가지 마음,

여러 가지 무더기(蘊),

여러 가지 요소(界, dhatu),

여러 가지 감각장소(處),

禪을 극복함,

대상을 극복함,

구성요소의 결정,

상의 결정,

구성요소의 변이,

대상의 변이,

한쪽에서의 확장함,

양족에서의 확장함

 

이 분명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MA.ii.256)

 

 

계속해서 주석서는 말한다.

"아비담마의 법을 논하지 않는 자는

 

법을 말할 때

 

그것이 자기의 교리인지 다른 사람의 교리인지 알지 못하여

자기의 교리를 설하리라고 하면서 다른 이의 교리를 설하고, 다른 이의 교리를 설하리라고 하면서

자기의 교리를 설하여 각각의 교리에 대해 거짓을 말한다.

 

아비담마의 법을 논하는 자는 자기의 교리의 확실성에 의해 자기의 교리를 설하고, 다른 이의 교리의

확실성에 의해 다른 이의 교리를 설하여 각각의 교리에 거짓을 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갈라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료 수행자가 아비담마의 법을 설하는 자가 되어서야

미세한 경우들에 대해 지혜를 얻고 위빳사나를 증장하여 출세간법을 실현할 수 있다.'라고.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MA.ii.256)

 

 

본경에 나타나는 이 '아비담마(abhidhamma)'라는 술어

「논장」즉 아비담마(Abhidhamma)가 부처님과 그 직계제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경전적 근거가된다 할 수 있다.

 

「논장」즉 칠론(七論) 가운데 첫 번째 가르침인 「담마상가니」(Dhs)의 주석서 「앗타살리니」(DhsA) 서문에서 아비담마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것(abhidhammo Buddha bhasito)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몇 가지 출처를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출처들 가운데 하나로 본경의 이 문단을 인용하고 있다.(DhsA.29)

 

본경 §8에 나타나는 목갈라나 존자의 말은 아래 §15에서 세존의 인정을 받는데

「앗타살리니 」는 이것을 예로 들면서 아비담마는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것이라고 강조한다.(ibid)

 

 

여려 부파의 아비담마/아비달마 쳬계를 비교 연구한 후미나로 와타나베 교수

아비담마는 니까야에 나타난 토론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처럼

아비담마 혹은 「논장」의 가르침은 니까야에 튼튼한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다.

 

 

 

3. 아비담마가 무엇인지에 대한 갈증

 

그 사이 사경을 하면서 가끔씩 경장에도 아비담마의 내용이라든가, 아비담마에 관련한 언급이

드문드문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위 '구경법'에 대한 의문 때문에 「청정도론」이나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주마간산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만, 경에 대한 앎이 부족한 탓도 있겠습니다만, 그 내용에 있어서나 전개에 있어서

세상에 이같이 어렵고 불친절한 책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마음에 대한 어떤 것은 너무나 심오하여 소름이 끼치고, 어떤 내용들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과연 이것이 사실인가 싶고, 어떤 내용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인 내용과도 너무 달라 도대체

그 쓰이는 단어의 정의부터 다시 해야만 해석이 가능한 부분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담마는 소위 구경법이고 진제이며, 경에서 하신 말씀은 인습적인 표현을 빌어서 하신 것이고 그리하여 속제라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만일 아비담마가 '구경법'이라면 그것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모든 것의 실체를 담은 것일 것입니다.

 

 

아비담마에 대한 저의 의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부터 시작합니다.

 

1.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차 결집 때 아비담마는 결집된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1차 결집  때는 쿳다까 니까야를 제외하고 4부 니까야만이 결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비담마는 부파분열 등으로 인해 아쇼카 대왕 때에 정설을 확립하기 위해 성립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비담마가 정설(正說)이요 '구경법'이라면 왜 5백 아라한들이 모이신 1차 결집 때에

   결집되지 않은 것일까요?  이후 부파분열이 계속되면서 각 부파마다 아비담마 체계를 별도로

   갖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 아라한들께서는 이런 일을 예측하여 '구경법'의 실체를

   미리 밝혀 놓아 그런 일에 대비를 하실 필요를 보지 못하셨던 것일까요?

 

2. 아직 경을 다 본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이떼까지 본 경의 어디를 보아도

   경에 설하신 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아라한이 되거나 도과를 성취했다는 말씀은 나옵니다만

   아비담마를 듣고 도과를 성취했다거나, 경을 들었을 때는 '구경법'을 알지 못해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했다가, 이후 아비담마를 듣고서야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존께서 설하신 바 경(經)을 머리 위에 받잡고, 아비담마는 그 위치가 어디라고

   새겨야 하는 것일까요?

 

3. '아비담마'가 실체요, 진제요, 구경법이어서 실로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어째서 경장에서 세존께서 아비담마를 상세하게 설하신 내용은 만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마땅히 세존께서 아주아주 상세하게, 그것도 여러 번 

   말씀하셨을 것인 바, 적어도 니까야에서는 그런 광경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됩

   니다.

 

   만일 아비담마를 상세하게 꿰뚫어야 '괴로움의 끝'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세존께서는 너희들은 나의 이 가르침을 깊이 새기고, 그것을 체화하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상세하게 설한 것과 같이 아비담마를 공부하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인데,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아비담마와 관련한 저의 의문입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의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4. 아비담마는 부처의 직설이다.

 

*출처: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 옮김 「담마상가니」역자서문 45페이지에서

              - 본 4 및 아래 5절

 

이처럼 법을 대면하여(對法)

수승한 법(無比法)으로 정리해 낸 것이 아비담마 체계이다.

 

이제 우리는 '그러면 아비담마는 부처님의 직설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아비담마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정리해 낸 체계가 아닌가?

부처님께 기원을 두지 않는 체계를 두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사유와 고민은 아비담마를 접하는 모든 시대의 불자들이 당연히 해왔을 것이고

당연히 빠알리 주석서의 문헌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논장의 칠론 가운데 첫 번째인 본 「담마상가니」의 주석서에서도

그것도 서문에서 붓다고사스님은 직접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결론적으로 「담마상가니 주석서」(「앗타살리니」) 서문을 종합해서 말하면 -

 

부처님의 가르침은

삼장으로도 분류되고 다섯 가지 니까야로도 분류되고 구분교로도 분류되고

8만4천 법문으로도 분류되는데,

 

아비담마는 삼장에도 포함되고 다섯 가지 니까야에도 포함되고 구분교에도 포함되고

8만4천 법문에도 포함된다.

 

만일 아비담마가 없으면 초기불교의 이러한 체계가 무너지고 만다.

 

 

이런 등의 이유 때문에 아비담마는 부처님의 직설이라는 것이

「담마상가니」의 주석서인「앗타살리니」의 초지일관한 태도이다.

 

그래서 「앗타살리니」서문은 아비담마가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라는 주장을 여러 곳에서

강하게 비판하면서 아비담마는 부처님의 직설임을 밝히는 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담마상가니 주석서」즉「앗타살리니」서문을 종합하면,

 

1) 부처님께서 네 번째 칠 일 동안에 스스로 체계화하신 자내증(自內證)의 법이요,

2) 일곱 번째 안거에서 석 달 동안 신들에게 설하신 것이며,

3) 사리뿟따 존자가 이를 인간 세계에 전한 것이요,

 

그래서 법의 정수, 즉 수승한 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앗타살리니」를 통해서 붓다고사 스님은

아비담마를 제일 먼저 설하신 분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확고하게

말하고 있다.

 

 

 

니까야의 여러 경들에서 부처님의 제자인 사리뿟따 존자나 아난다 존자와 같은 여러 직계 제자들도

법을 설한다. 그렇디고 해서 법의 기원이 그분 직계 제자들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법의 기원은 당연히 부처님이시다.

 

사리뿟따 존자는 분명히 아비담마를 설한 분이고 아비담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리뿟따 존자가 아비담아의 기원이라고 하면 안 된다.

 

아비담마도 부처님이 체계화하셨고 부처님께서 일곱 번째 안거에서 신들에게 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도 부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고 그래서 부처님 말씀이라는 것이

주석서들의 일관된 입장이다.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아비담마가 부처님의 직설임을

율장을 통한 증거와 경장을 통한 증거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율장을 통한 증거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1)

"비방할 의도가 없이 '도반은 경이나 게송이나 아비담마를 (먼저) 배우고 나중에 율을 배우시오.'

라고 하는 것은 범계가 아니다."(Vin.iv.144)라는 단타죄(單墮罪) 편 §442에 나타나는 항목을

인용한다.

 

2)

그리고 「비구니 경분별」에 속하는 단타죄 편 1221에 나타나는

"(비구니가) 경에 관한 질문을 허락받은 뒤 아비담마나 율에 대해서 질문을 하거나,

아비담마에에 대한 질문을 허락받은 뒤 경에 대해서 질문을 하거나,

율에 관한 질문을 허락받은 뒤 경이나 아비담마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단타죄(單墮罪)를 범한 것이다."(Vin.iv.344)라는 항목도 인용한다.

 

이렇게 아비담마가 언급하고 있는 율장의 두 항목을 인용한 뒤에

"이 정도만으로도 이설을 말하는 자는 논박되었다."(DhsA.28)라고 강조된다.

 

아비담마는 이렇게 율장의 제목에 포함되어 나올 정도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결론짓는다. 자세한 것은「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 §73를 

참조하기 바란다.

 

 

2] 경장을 통한 증거

 

계속해서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아비담마가 경장에서도 언급이 되고 있음을

맛지마니까야 제2권 「고싱가살라 긴 경」(M32) 가운데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 두 비구가 있어 아비담마에 대한 논의를 하는데, 그들은 서로에게 질문을 하고 각자 받은 질문에 대답하여 그칠 중을 모르고 그들의 대화는 법에 근거하여 계속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이런 비구가 고싱가살라 숲을 빛나게 합니다."(M32 §8)라고 마하목갈라나 장로가 한 말을 인용하고,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 "장하구나, 장하구나. 목갈라나는 그것을 바르게 설명하면서 그가 실제 행했던대로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리뿟따여, 목갈라나는 참으로 법에 대한 노늬를 잘하는 자이기 때문이다."(M32 §15)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인용한다.

 

 

그런 뒤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아비담마를 논하는 비구들이야말로 참으로 법을 논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그 외에는 법을 논하여 설하더라도 법을 논하는 자들이 아니다.

 

왜 그런가?

 

그들은 법을 논하여 설하더라도

여러 종류의 에 대해서 (혼동하고)

여러 종류의 과보에 대해서 (혼동하고)

여러 종류의 에 대해서 혼동하여 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비담마를 논하는 자들은 여러 종류의 업에 대해서 혼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를 논하는 비구는 법을 설하든 설하지 않든,

질문을 받은 때에 그 질문에 대해 (바르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만이 전적으로 법을 설하는 자이다.

 

이것을 두고 스승께서는 장하다는 칭찬을 하신 뒤에 "목갈라나는 잘 설명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DhsA.29)

 

 

이렇게 이미 경장에서 부처님께서 아비담마를 칭송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비담마는 부처님 시대에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고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설명한다.

 

 

사실 아비담마라는 용어는 니까야에서

1) 이 「고싱가살라 긴 경」(M32) 이외에도

 

2) 「합송경」(D33 §3.3)과       (http://blog.daum.net/ibakdal/17371419)

3) 「십상경」(D34 §2.3)에서    (http://blog.daum.net/ibakdal/17371433)

아비담마아비위나냐로 나타나며

 

4)「날라까빠나 경(M68 §17)

5)「어떻게 생각하는가 경」(M103 §4)

6) 앙굿따라 니까야 「망아지 경」(A3 §137)

 

11개 정도의 경에 나타나고 있다.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이처럼 「고싱가살라 긴 경」(M32) 을 인용하면서

아비담마가 부처님의 친설(親說)임을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결론짓는다.

 

"아비담마를 따돌리는 것은

 

1) 이 승자의 (법의) 바퀴에 주먹을 날리는 것이고,

2) 일체지의 지혜(一切智智)를 따돌리는 것이며,

3) 스승의 무외(無畏)의 지혜를 거꾸로 되돌리는 것이고,

4) (법을) 듣고자 하는 회중을 속이는 것이며,

5) 성스러눈 도에 장애로 작용하고,

6) (승가를) 분열시키는 18가지 분과를 만드는 일(破事) 가운데 하나에 휘말려들어

    승가로부터 분리하는 거좌갈마와 견책갈마를 받게 된다.

 

이러한 업을 지은 뒤에는 '가시오,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자로 살아가시오.'라고 하면서

축출될 것이다.(DhsA.29)

 

 

 

3] 직설이라면 왜 경장과 논장은 전개가 다른가?

 

계속해서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다음과 같은 반대론자의 말을 제시하며 논의를 계속한다.

 

"그러면 (이설을 말하는 자(반대론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 아비담마가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라면 수천 개의 경에서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 머무셨다."(D16 §1.1 등)라는 등의 방법으로 경의 기원을 밝힌 것처럼 (아비담마를 설하게 된) 기원을 밝혔을 것이다.'라고."(DhsA.29)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주석서는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 번째는 이러하다.

"저 「자따까」와 「숫따니빠따」와 「법구경」등은 그런 형태의 (경을 설하게 된) 기원이 없는데, 그렇다고 이 경들이 부처님이 설하신 경이 아닌 것은 아니다."(DhsA 29)라고 논박한다.

 

「쿳다까 니까야」의 여러 경들에도 경을 설하게 된 기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경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이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반대론자의 문제 제기를 논파한 뒤에

주석서는 부처님들의 위대하심을 찬탄하고 나서

아비담마는 부처님들의 영역이라고 이렇게 결론짓는다.

 

"아비담마는 이러한 부처님들이 설하실 수 있는 가르침이며,,,,,,,,

이 아비담마는 일체지를 갖추신 부처님들의 영역이지 다른 자들의 영역이 아니다."(DhsA. 230)

 

즉 아비담마의 기원을 밝히시지 않은 것은

부처님들의 마음이고, 일체지를 갖춘 그분들의 영역이지,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주석서는 "이러한 심오한 방법의 바다인 아비담마는 부처님이 설하셨다."(DhsA. 12)라고 강조하고 있다.

 

 

 

5. 아비담마는 언제 체계화하셨는가?

 

이처럼 아비담마는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주석서는 강조하고 있다.

아비담마가 부처님의 직설이라면 부처님께서는 언제 아비담마를 체계화하셨늕가 하는 것도 우리의 관심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도 후 네 번째 칠 일에 체계화하셨고,

일곱 번째 안거에서 석 달간 삼십삼천의 신들에게 직접 설하셨다.

 

 

1] 아비담마는 성도 후 네 번쩨 칠 일에 명상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성도 과정과 성도 후의 일화를 담고 있는 맛지마니까야 「성스러운 구함 경」(M26)에 해당하는 주석서(MA.ii.181∼186)에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신 뒤 49일 동안에 하셨던 일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세존께서는 깔라 용왕의 거처가 있는 만제리까라는 숲에서 깨달으셨는데

    첫 번째 칠 일깨달은 바로 그 장소에서 가부좌한 하나의 자세로 좌정하고 계셨다.

 

2) 두 번째 칠 일깨달음을 증득하신 바그 자리와 그 나무를

    눈을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면서 보냈다.

 

3) 세 번쩨 칠 일은 그곳 가까이에서 동에서 서로 길게 포행을 하시면서 보내셨다.

 

4) 네 번째 칠 일논장」(論藏, Abhidhamma-pitaka)을 체계화하셨다.

 

5) 다섯 번째 칠 일은 보리수 아래로부터 염소치기 니그로다 나무로 가셔서

    거기서 아비담마에 대한 조직적인 도(naya-magga)를 명상하셨다.

 

6) 여섯 번째 칠 일무짤란다 나무 아래 머무셨다.

 

7) 일곱 번째 칠 일왕의 처소라 불리는 나무 아래서 머무셨다.

 

 

이렇게 칠 일을 보내신 뒤에 다시 염소치기의 나무 아래로 가셔서

상윳따 니까야 제1권 「권청(勸晴) 경」(S6:1)에 나타나는 접법을 주저하는 사유를 하셨고

사함빠디 범천은 세존께서 세상에 법을 설해 주시기를 간청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세존께서는 사함빠디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오비구에게 상윳따 니까야 제6권의

「초전법륜경」(S56:11)을 설하셨고, 그들은 그 후에 상윳따 니까야 제3권 「무아의 특징 경」(S22:59)를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이 가운데 아비담마를 체계화하신 네 번째 칠 일에 초점을 맞추어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에 인용을 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는 · · · ·

네 번째 칠 일 동안에는 북동쪽 방향에 있는 보배창고에 앉으셨다,

여기서 보배창고는 칠보로 된 집이 아니다. 칠론(七論)에 정통한 장소를 보배라고 알아야 한다.

 

거기서 1)「담마상가니」논서를 명상했을 때에도 몸에서 광명은 나오지 않았다.

2)「위방가」논서와 3)「다뚜까타」4)「뿍갈라빤냣띠」5)「까타왓투」논서와

6)「야마까」논서를 명상햇을 때도 몸에서 광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7)「마하빠까라나」(큰 논서 = 「빳타나」)에 침잠하여

"원인의 조건, 대상의 조건· · · ·떠나지 않은 조건"이라고 명상하기 시작하여

24가지 전체 「빳타나」를 명상하셨을 때에 그분의 일체지의 지혜는 전적으로「마하빠까라나」(큰 논서 = 「빳타나」)에서 그 어울리는 곳을 얻게 되었다.

 

· · · ·

 

칠 일 낮과 밤 동안 명상한 법은 얼마나 많은 것이었는가?

끝없고 무량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마음으로 예측한 것만을 일컫는다.

 

그러나 스승께서 이와 같이 칠 일 동안 마음으로 사유한 법을 말로써 구분해서 설하신다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십만 년이 지나더라도 그 끝에 도달하여 다 설하지 못하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DhsA. 12-15)

 

 

이처럼 아비담마는 성도 후 네 번째 칠일에 명상하여 체계화하신 것이고,

세존께서 이렇게 칠론을 체계화하신 곳을 불교에서는 보배창고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타사에 가면 이 보배창고를 비롯한 여섯 곳이 표시되어 있어서 성지순례를 하는 불자들에게 큰 환희심을 주고 있다.

 

 

 

2] 아비담마는 일곱 번째 안거 때 신들에게 설하신 것이다.

 

주석서들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이렇게 체계화하신 아비담마를 직접 설하신 곳은

일곱 번째 안거 때 석달 간 삼십삼천에서라고 한다.

 

상윳따 니까야 제1권 「깟사빠 경」(S2:1)을 주석하면서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는

세존께서 성도하신 후 7년째 되던 해에 쌍신변을 나투시어 삼십삼천에 안거를 나러 가셔서

아비담마를 설하신 것을 두고 이렇게 적고 있다.

 

"세존께서 성도하신 후 7년째 되던 해에 쌍신변을 나투시어 삼십삼천에 안거를 나러 가셔서

아비담마를 설하시면서 禪의 분석에서 '비구란 일반적으로 일컫는 비구와 이름만인 비구가 있다.(Vbh.245-246)라고 비구에 대한 해설을 말씀하신 것을 이 신의 아들은 들었다."(SA.i.103)

 

 

담마상가니 주석서이렇게 적고 있다.

 

"나중에도 역시(일곱 번째 안거를 말함) 여래께서는 삼십삼천의 빠릿찻따까 나무 아래에 있는

붉은 대리석 위에서 일만의 세계에 있는 신들 가운데 앉으셔서

 

어머니를 직접 대면하여 '유익한 법들과 해로운 법들과 결정할 수 없는(無記) 법들'이라는

법을 가르치면서 백으로 구분하고 천으로 구분하고 백천으로 구분하여 특별한 법들로부터 (다른)

특별한 법으로 자유저재로 옮기면서 가르치셨다.

 

석 달 동안 끊임없이 전개된 가르침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물의 흐름처럼 빠르게 전개되어 끝이 없고 무량하였다."(DhsA.15)

 

더 자세한 묘사는 본서 제2권 말미에 첨부하고 있는 「담마상가니 주석서」서문 제31 이하를 참조하기 바란다.

 

 

 

6. 소결(小結)

 

1)

「고싱가살라 경」(M22)에 이어지는 「소치는 사람의 긴 경」(M33)을 보면,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물 마시는 곳을 아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율(경장.율장)을 호지하고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하는 장로 비구들에게

    자주 다가가서 

 

   '존자들이시여,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이며, 이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질문한다."

 

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법.율(경장.율장)을 호지하고"라는 표현 다음에 별도로 "논모(論母, 마띠까)를 호지하는"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존의 말씀은 단 한 마디도 헛말이나

의미없는 중언부언이 없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다른 경에서도 본 기억이 있습니다.

 

 

2)

저는 거룩하신 성자이신 사리뿟따 존자께 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분은 디가니까야  「십상경」과 「합송경」에서 분명히 '아비담마'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존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를 뿐 자신의 교설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런 영역' 즉 '아비담마'라고 할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세존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경을 합송하면서 그대로의 것이지,'아비담마'를 위해서 후세에 없는 것을 끼워넣을 그런 승가가

죽으면 죽었지 그럴 일을 하시지 않을 분들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3)

이 논란이 그리 쉬운 것이라면 긴 세월 '아비담마'가 부처님이 설하신 것인지 아닌지 이어졌을 리가

없습니다. 이 조그마한 틈을 비집고 수많은 이설(異說)이, 교단이 성립한 것도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존의 가르침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는 것은 오직 설하신 바 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습니다.'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며, 내안에 머물도록 인도할만한 가르침이며, 지자라면 각자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법에 대한 스승님의 가르침입니다.

 

 

4)

디가니까야 주석서 서문에 따르면(http://blog.daum.net/ibakdal/17371454)

쿳다까니까야 뿐아니라 아비담마 즉 「논장」도 1차 결집 때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는 이와는 달라서 1차 결집 때에는 4부 니까야만이 결집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디가니까야 주석서 서문을 집필한 분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싶습니다. '거짓말'은 범계이고 그러기에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5)

- 경장에서의 세존의 가르침은 모두 어떤 상황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세존께서 그러한 가르침을 펴신 그 근본 즉 팩트(fact)들에 대한 것 없다고 누구도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아비담마는 분명히 경장에서 세존과 그 제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법에 대해서' 논의라는 것은 토론의 대상이고 장려된 것이었습니다. 그 토론은 끝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아비담마가 경장에서 얻는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위에 있는 것은 적어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순서가 말입니다.

 

- 그러기에 '취착없이, 내 마음이, 번뇌들로부터, 해탈'하는 것이 최상이지 아비담마가 최상이라고

   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팩트를 잘 꿰뚫어 안다고 해서 마음이 바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출세간법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그 앎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아비담마를 '구경법', '진제'라고 칭하고, 경(經)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속제'라고

   칭하는 그러한 구분 내지 언설 자체가 잘못된 말놀음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르게됩니다.

   사성제 외에 따로 구경법, 진제란 없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인습적인 표현을

   빌려서 구경과 구경에 이르는 길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을 두고 평생을 읽어도 다 못 읽을 주석서와 복주석서와 다른 부파의

   아비담마를 다 보아야 알 수 있는 그런 법을 세존께서는 설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지자라면 언즉시야에 얻어가지는 그런 법을 설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대림스님께 이와 관련한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의혹을 가지고 입니다.

  스님은 그런 줄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제 경에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에 임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막막하기조차 한 것입니다. 아비담마는 '수행'의 지침서와도 같은 것입니다."

 

  수행에 임하는 자가 과거에 부처님의 제자들은 어떤 앎과 봄을 가지고 수행에 임했는지 모르고

  혹은 그것과 관련된 기록들을 아예 무시하고 수행에 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 아비담마와 관련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비담마 즉 칠론(七論)에 대해서 저는 아무 의심이 없기로 했습니다. 거짓이 없는 그분들이기에.

  사실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모릅니다.

  의심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경이 있습니다.

  기상천외한 그 말씀들을 수행을 통해서 하나하나씩 스스로 검증하겠습니다.

 

 

 

 

2016.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