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니까야(中部)/M9.바른 견해 경-바른 견해의 증득

後記: 바른 견해 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5. 11. 8. 16:15

  

바른 견해 경은

 

세존께서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실 때

사리뿟따 존자께서 비구들에게 설하신 경입니다.

 

 

1. 바른 견해의 무게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바른 견해, 바른 견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제자가

 

'1) 바른 견해를 가지고,

 2) 견해가 올 곧으며,

 3)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4) 정법에 도달했다'

 

고 할 수 있는가라고 비구들에게 묻는 것으로 이 경을 설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비구들에게 바른 견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대단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위의 4가지 질문은 세존께서 반열반하신지 2,559년이 지난 오늘에도 부처님 제자라면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른 견해'에 대한 정확한 앎(知)와 봄(見)이 없이는 그는

 

1) 틀린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되며,

2) 올 곧지 않은 견해를 가진 것이 되고,

3) 그러한 결과로 결국 법에 대해서 깨끗할지는 몰라도 꿰뚫어 앎이 결여된 것을 원인으로 

    경우에 따라서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4) 따라서 정법에 도달한 것이 아니거나, 궁극에 정법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2. 기능인 동시에 목적

 

바른 견해(正見)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道聖諦)인

팔정도(八支聖道)의 첫 번째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접근이 있을 수 있겠으나,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8가지 성스러운 도닦음 中에서,

 

'바른 견해(正見)'는 팔정도의 근본이자 시작이 되는 가장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입니다.

먼저 '바른 견해'가 없이는 그 이하 다른 7가지 도닦음의 동기부여가 없어, 그러한 도닦음을

시작하기 어려운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견해의 확립은 그 사람의 배움이나 수행이나 성취의 정도에 따라 점점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그 정도의 차이일 뿐으로,

 

팔정도라는 쾌락이나 고행의 양극단을 여읜 중도(中道)의 선택, 혹은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

하는 성스러운 도닦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러한 도닦음에 들어서게 하는 동기일 뿐 아니라,

그러한 도닦음의 방법에 궁극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머물게 하는 이유가 바로 '바른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3. 바른 견해의 중심축인 사성제

 

이러한 '바른 견해'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대념처경」(D22)에서와 같이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비구들이여,

 

    1) 괴로움에 대한 지혜,

    2)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3)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4)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0355)

 

와 같이 '바른 견해'란 바로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지혜라고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이 있지만

본경에서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이러한 세존의 가르침의 뜻을 더욱 명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여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견해'란 배움과 수행의 근본이요, 시작이며, 중간이며, 그 이루어야 할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인 바, 여기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을 주시는 사리뿟따 존자님의 배려가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 바른 견해의 4가지 주춧돌_유익함과 해로움/음식(세상)/사성제/연기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본경에서 이 '바른 견해(正見'에 대해

마치 집을 지을 때 4개의 주춧돌을 놓듯이 그 4개의 주춧돌이 무엇인지 설명하시는 것과 같이

바른 견해를 설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부처님의 제자가

 

'1) 바른 견해를 가지고,

 2) 견해가 올 곧으며,

 3)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4) 정법에 도달했다'

 

고 할 수 있기 위하여는 아래와 같이 크게 4가지를 '꿰뚫어 알아야' 한다고 설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꿰뚤어 앎'이라는 말씀은 수도 없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제1경인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에서의 주제도 결국은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꿰뚫어 앎'이란 것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엇을 꿰뚫어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누구로부터 혹은 어떤 계기로 알게 된 다음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 숙고하고 고찰하고 연습하고 수행하여 온전히 자기의 것이 된 나머지

어떤 경우에도 걸리지 않고 통달하여 쓸 수 있게 된 것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결국 '꿰뚫어 앎'이란 것은 배움과 수행에 의해서 얻게 되는 것임을 본론에 들어가기 이전에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취에 있어서 '혼자 은둔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지낸다'는 말씀은 그러한 성취를 얻게 되는 과정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표현임을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1] 해로움, 해로움의 뿌리, 유익함, 유익함의 뿌리를 꿰뚫어 아는 것

 

 ■ 해로움

 

      1) 생명을 죽이는 것

      2)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

      3) 삿된 음행을 하는 것

   

      4) 거짓말하는 것

      5) 중상모략하는 것

      6) 욕설을 하는 것

      7) 잡담을 하는 것

 

      8) 욕심

      9) 악의

    10) 삿된 견해

 

 ■ 해로움의 뿌리

 

    1) 탐욕

    2) 성냄

    3) 어리석음

 

 

 ■ 유익함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

      2)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삼가는 것

      3)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

   

      4) 거짓말을 삼가는 것

      5) 중상모략을 삼가는 것

      6) 욕설을 삼가는 것

      7) 잡담을 삼가는 것

 

      8) 욕심 없음

      9) 악의 없음

    10) 바른 견해

 

 ■ 유익함의 뿌리

 

    1) 탐욕 없음

    2) 성냄 없음

    3) 어리석음 없음

 

 

2] 음식, 음식의 일어님, 음식의 소멸. 음식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아는 것

 

    1) 4가지 음식

       ①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

       ② 감각접촉

       ③ 마음의 의도

       ④ 알음알이

 

    2) 갈애가 일어나면 음식이 일어남

    3) 갈애가 소멸하면 음식이 소멸함

    4) 음식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3]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 四聖諦)를 꿰뚫어 아는 것

 

    괴로움을 꿰뚫어 알고,

    괴로움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괴로움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괴로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둟어 아는 것.

 

 

    1) 괴로움

 

      ① 태어남

      ② 늙음

      ③ 병

      ④ 죽음

 

      ⑤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⑥ 원하는것을 얻지 못하는 것 

 

      요컨대,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2) 괴로움의 일어남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이니, 즉 

 

      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②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③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3) 괴로움의 소멸

 

      그 갈애가

 

      ①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

      ② 버림

      ③ 놓아버림

      ④ 벗어남

      ⑤ 집착 없음

 

 

    4)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마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

 

 

4] 연기(緣起)를 꿰뚫어 앎

 

    1) 늙음과 죽음/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2) 태어남/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3) 존재/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4) 취착/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5) 갈애/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6) 느낌/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7) 감각접촉/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8) 여섯 감각장소/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9) 정신·물질/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10) 알음알이/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11) 의도적 행위/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12) 무명/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13) 번뇌/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1)「늙음·죽음/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늙음

        ① 늙음, 노쇠함, 이가 빠짐, 머리털이 허옇게 셈, 피부가 주름짐

        ② 수명의 감소

        ③ 감관의 노화

 

      - 죽음

        ① 죽음, 떨어짐, 부서짐, 없어짐, 종말, 사망, 서거,

        ② 오온의 부서짐,

        ③ 시체를 안치함,

        ④ 생명기능(名根)의 끊어짐

 

     - 태어남이 일어나면 늙음·죽음이 일어남

     -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죽음이 소멸함

     - 늙음·죽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2)「태어남/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태어남

        ① 여러 중생의 부류에서 이런저런 중생들태어남,

        ② 출생, 도래함, 생김, 탄생,

        ③ 무더기의 나타남,

        ④ 여섯 감각장소(六入)의 획득

 

     - 존재가 일어나기 때문에 태어남이 일어남

     -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함

     - 존재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3)「존재/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둟어 앎

 

      - 존재

         ① 욕계 존재(欲有)

         ② 색계 존재(色有)

         ③ 무색계 존재(無色有)

 

      - 취착(取)이 일어나기 때문에 존재가 일어남

      -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함

      - 취착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4)「취착/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취착

         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慾取)

         ② 견해애 대한 취착(見取)

         ③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戒禁取)

         ④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我語取)

 

      - 갈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취착이 일어남

      - 갈애가 소멸하기 대문에 취착이 소멸함

      - 갈애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5)「갈애/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갈애

         ① 형색에 대한 갈애

         ② 소리에 대한 갈애

         ③ 냄새에 대한 갈애

         ④ 맛에 대한 갈애

         ⑤ 감촉에 대한 갈애

         ⑥ 법에 대한 갈애

 

      -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에 갈애가 일어남

      -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함

      -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6) 「느낌/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느낌(受)

          ① 눈과 접촉하여 생긴 느낌,

          ② 귀와 접촉하여 생긴 느낌,

          ③ 코와 접촉하여 생긴 느낌,

          ④ 혀와 접촉하여 생긴 느낌,

          ⑤ 몸과 접촉하여 생긴 느낌,

          ⑥ 마노[()]와 접촉하여 생긴 느낌

 

       - 감각접촉이 일어나기 때문에 느낌이 일어남

       -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함

       -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7)「감각접촉/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감각접촉

          ① 눈의 감각접촉

          ② 귀의 감각접촉

          ③ 코의 감각접촉

          ④ 혀의 감각접촉

          ⑤ 몸의 감각접촉

          ⑥ 마노의 감각접촉[意觸(의촉)]

 

       - 여섯 감각장소(六入)이 일어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일어남

       -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함

       - 감각접촉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8)「여섯 감각장소/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둟어 앎

 

       - 여섯 감각장소       

          ① 눈의 감각장소

          ② 귀의 감각장소

          ③ 코의 감각장소

          ④ 혀의 감각장소

          ⑤ 몸의 감각장소

          ⑥ 마노의 감각장소

 

       -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일어남

       - 정신·물질(名色)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함

       - 여섯 감각장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9)「정신·물질/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정신·물질(名色)

 

        ■ 정신

         ① 느낌(受)

         ② 인식(想)

         ③ 의도(思)

         ④ 감각접촉(觸)

         ⑤ 마음에 잡도리함(作意)

 

        ■ 물질

         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② 그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들(所造色)

 

       - 알음알이(識)가 일어나기 때문에 정신·물질이 일어남

       -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이 소멸함

       - 정신´물질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10)「알음알이/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알음알이(識)

          ① 의 알음알이

          ② 의 알음알이

          ③ 의 알음알이

          ④ 의 알음알이

          ⑤ 의 알음알이

          ⑥ 마노의 알음알이(意識)

 

       - 의도적 행위들(行)이 일어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일어남

       -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함

       - 알음알이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11)「의도적 행위/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의도적 행위(行, sankhara)

          ①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

          ② 말의 의도적 행위(口行)

          ③ 마음의 의도적 행위(心行)

 

       - 무명이 일어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가 일어남

       -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가 소멸함

       - 의도적 행위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12)「무명/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무명(無明)

          ①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②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③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④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

 

       - 번뇌(漏)가 일어나기 때문에 무명이 일어남

       -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무명이 소멸함

       - 무명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13)「번뇌/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앎

 

       - 번뇌

          ①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

          ② 존재의 번뇌(有漏),

          ③ 무명의 기인한 번뇌(無明漏)

 

       - 무명이 일어나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남

       -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함

       -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팔정도

 

 

 

위와 같이

 

1) 해로움/해로움의 뿌리, 유익함/유익함의 뿌리

2) 음식/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3)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締)

4) 연기의 13가지 곡절/일어남/소멸/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

 

을 꿰뚫어 알 때,

 

 

비로소 그는

 

1) 욕망의 잠재성향,

2) 적대감의 잠재성향,

3)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

 

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영지를 일으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는 바,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1) 바른 견해를 가지고,

    2) 견해가 올곧으며,

    3)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4) 정법에 도달했다

 

고 한다고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천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5. 새김과 느낀 점

 

'바른 견해'에 대한 사리뿟따 형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 바른 견해의 4가지 기둥을 설하심에 대해서

 

'바른 견해'란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이라는 핵심에 더불어서

존자께서는 그 발끝부터 머리끝까지를 4가지로 꿰뚫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1) 해로움과 해로움의 뿌리, 유익함과 유익함의 뿌리

 

    만일 도를 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십선업十善業)을 행할지언정

    어떤 경우라도 어떤 이유로라도 십악업(十惡業)을 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모르지만 말로는 '깨달았다'라고 하면서 혹은 '깨달음을 구한다'고 하면서

    악업을 행하는 자는 그 근본이 크게 잘못된 것이며, '바른 견해'와는 멀리 멀리 떨어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콩밭에서 소금을 구한다고 하는 격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존자께서는 해로움과 유익함을 알 뿐 아니라 그 '뿌리'를 꿰뚫어 알아야 바른 견해를

    가진 것이라고 설하십니다.  그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고 존자께서는 설하십니다.

 

 

2) 음식_ 존재와 세상 사이의 상호작용

 

   ①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 ② 감각접촉, ③ 마음의 의도, ④ 알음알이

   라는 4가지 음식이 있다고 하시는 부분은 참으로 욕계 인간세상에 머무는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에 머무는 중생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생각

   하면 그리 놀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세존께서는 중생에게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음식'이라고

   설하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유익함과 해로움을 꿰뚫어 아는 것과 이 음식에 관련된 부분 후에 나타나는 사성제와 연기의 법문

   사이에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왜 갑자기 '음식'에 대해서 설하셨을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덩어리진 먹는 음식(段食)도 그러하지만 그후 감각접촉(觸), 마음의 의도(行), 알음알이(識)을 보면

   그것은 그야말로 그것들이 존재들이 의지하여 먹고 사는 음식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지만,

 

   갈애가 일어나면 음식이 일어나고, 갈애가 소멸하면 음식이 또한 소멸한다고 설하신 점,

 

   마음의 의도를 의지하여 알음알이가 나타나는 것을, 알음알이를 의지하여 정신·물질이 나타나는

   것을, 그리하여 육입(六入)이, 그리하여 감각접촉(觸)이 일어나서 이러한 것들이 종국에 모두

   '음식'이라 할 만한 것이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음식'의 법문은 느닷없이 먹고 사는 것이 나온 것이나 뜬금없는 비약이 아니라,

   '바른 견해'를 얻기 위하여는 먼저 해로움과 유익함이라는 뿌리에 굳게 선 다음,

   혹은 그러므로 계(戒)에 굳게 선 다음,

 

   그 존재가 음식으로 하는 세상, 혹은 그 존재와 그가 머무는 세상 사이에 펼쳐지는 상호작용에

   대하여 꿰뚫어 알아야 한다는 법문으로 새겨집니다.

 

 

3) 사성제

 

   사성제를 꿰뚫어 앎없는 바른 견해란 성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4) 연기

 

    '바른 견해'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연기(緣起)'를 꿰뚫어 알아야 한다는 사리뿟따 존자의

    법문은 마치 큰 북소리가 나는 듯합니다.

 

    연기의 순관(順觀)이 전체 괴로움(苦蘊)의 일어남이요 '일어남'의 지혜를 증득함이요,

    연기의 역관(逆觀)이 전체 괴로움의 소멸이여, '소멸'의 지혜를 증득함이요,

    이와 같이 '일어남·소멸'의 지혜를 증득함이 '위빳사나의 도'를 증득한 것이며,

 

    다시 이같은 도(道)로써

    오온(五蘊)을, 혹은 물질(色)·느낌(受)·지각(想)·상카라(行)·알음알이(識)를, 혹은 정신·물질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는 것임을 보면,

 

    그리하여 전체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꿰뚫어 알게 되는 것임을 보면,

·

    사성제가 자동차라면 연기는 그 엔진과 같고, 사성제가 동전의 앞면이라면 연기는 그 앞면을

    있게 하는 동전의 뒷면과 같은 것이어서 존자께서 '바른 견해'를 설하시면서 이같이 연기를

    꿰뚫어 알아야 바른 견해를 증득하게 된다는 것을 설하시는 것은 그 당연함과 더불어,

    후학들에게 '연기'가 과연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 상세한 설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완전한' 바른 견해 _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본경에서 사리뿟따 존자께서 '바른 견해'를 설하시는 방법을 보면 간명한것 같지만 심오한 전개를

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해로움과 유익함, 존재와 세상의 상호작용, 사성제, 연기에 대하여

각각 그 요소가 무엇인지, 그들의 일어남, 그들의 소멸, 그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는

 

    1) 욕망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2) 적대감의 잠재성향제거하고,

    3)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라고 모든 요소에 대하야 반복하여 설하시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꿰뚫어 안 다음, 그것을 기반으로

욕망, 적대감, 자만이라는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그리하여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낸 자라야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 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정법에 도달했다.'라고 할 수 있다고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이 된 자만이 온전히 '바른 견해'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이하는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팔정도를 이야기 할 때 맨 처음인

바른 견해도 결국 그 사람이 배우고 정진하고 닦는 정도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무명의 시작점_ 꼬리에 꼬리를 문 두 마리의 용처럼

 

세존께서는 연기를 설하실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기를 설하신 「대인연경」(D15)에서 9지 연기로 설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께서 설하신 본경 「바른 견해 경」(M9)의 특징은  연기를 설하심에 있어서의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 번째는 12지 연기를 역관하시면서 즉, '늙음·죽음>태어남>존재>취착>갈애>느낌>감각접촉>여섯

감각기관>정신·물질>알음알이>의도적 행위>무명'의 12지(支)를 설하시면서, 그 각 요소에 대해서

각각 그 하나하나마다 그것의 일어남과 소멸과 그것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시는 방법

으로 자아와 세상, 혹은 오온, 혹은 일체 정신·물질의 소멸을 밝히고 계신 점이며,

 

 

두 번째는 통상 12지 연기의 끝인 무명(無明)에 더하여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무명이 일어난다."라고 밝히고 계시고,

 

다시 그 번뇌의 부분에 이르러는

"무명이 일어나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다."라고 밝히고 계셔서

 

윤회의 시작으로 생각될 수 있는 무명에 대하여

무명은 번뇌를 조건으로, 다시 그 번뇌는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무명과 번뇌의 상호작용을 설하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부분에 이르러 떠오르는 것은 「대전기경」(D14)에서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있을 때 정신· 물질이 있으며,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정신 · 물질이 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은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를 통해서 마침내

   '알음알이(識)가 있을 때 정신 · 물질이 있으며,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하여 정신 · 물질이 있다.'

 

    라고 통찰지로 분명하게 꿰뚫어 보았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있을 때, 알음알이가 있으며,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은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를 통해서 마침내  

   '정신 · 물질(名色)이 있을 때 알음알이가 있으며,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있다.'

 

    라고 통찰지로 분명하게 꿰뚫어 보았다."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에게 이런 생각이 둘었다.

     

   '이 알음알이(識)는

    정신 · 물질에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난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1151)

 

라고 세존께서 윤회의 도리를 밝히시면서

정신·물질(名色)은 알음알이을 조건으로 일어나고, 그 알음알이는 다시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일어

나는 바, 이러한 고리를 넘어가지 못하여 윤회가 끝없이 계속됨을 꿰뚫어 설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정신·물질과 알음알이의 상호조건 됨과 윤회, 그리고 오온(세상)에 대해서 참으로

'기괴하고'(죄송합니다) 희유한 가르침이라고 해야 할 「대인연경」(D15)의 이 부분에 대한 세존의

가르침을 인용하면

 

   "아난다여,

 

    이와같이 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1) 이름짓는 토대가 생기고,

    2) 어원에 입각한 언어의 토대가 생기고,

    3) 개념을 얻는 토대가 생기고,

    4) 통찰지의 영역이 생기며,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윤회)는 전개되는 것이다.

 

  

    정신·물질

    알음알이와 더불어

 

    (오온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정신·물질(名色)과 알음알이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양상과,

이로 인해 윤회가 계속되는 것과,

심지어 더 나아가 이러한 정신·물질과 알음알이라는 것은 존재의 다섯 무더기, 오온,

즉 '나'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해 (나에게) 드러난 것이라고 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바른 것이라면 내 앞에 드러난 세상 혹은 내가 만나는 세상은 바로 '나'의 표현이며

그 세상은 바로 '나'여서 '나'가 어떤 세상(界)에 존재하는 한 이 계(界)는 '나'여서 '나'는 이 계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고 가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어쨌든 정신·물질(名色)과 알음알이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리를 넘어서지 못하여

윤회가 끝없이 계속되는 모습은,

 

그러한 도리를 끊고 넘어가서 다시 연기의 고리에서 그 알음알이의 조건이 되는 의도적 행위(行)

혹은 업(業) 형성을 넘어 그러한 의도적 행위의 조건이 되는 무명에 이르렀을 때

 

다시 무명이 번뇌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리에 다다르게 됩니다.

 

 

정신·물질(名色)과 알음알이(識)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습과

무명(無明)과 번뇌(漏)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습은

태극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누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과 같고

마치 거칠 것 없는 두 마리 용(龍)이 자웅을 겨루면서 꼬리에 꼬리를 문 모습과도 같습니다.

 

 

정신·물질과 알음알이가 첫 번째 관문을 지키는 한 쌍의 용이라면

무명과 번뇌는 그 마지막인 두 번째 관문을 지키는 또 한 쌍의 용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구경의 지혜에 이르기 위하여는 네 마리의 용이 그 문을 지키고 있는 형국입니다.

 

 

다른 경에도 무명에 이은 번뇌를 설하시는 경이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기실 '무명의 첫시작 점(pubba-koti)은 알려지지 않는다.'라는 많은 경의 가르침에서

'그렇다면 무명은 어디로부터 왔는가?'에 대한 질문은 응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풀과 나무 경」(S15.1)에서와 같이

 

   "비구들이여,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윤회.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치달리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윤회의) 처음 시작점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윤회이기 때문이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치달리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윤회의) 처음 시작점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1164)

 

   

이러한 방법으로 설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은 상윳따 니까야에서 제15주제인 '시작을 알지 못함 상윳따' 내의 20걔 경에서 세존께서는

모두 위와 같이 윤회는 그 시작을 알 수 없음을 천명하고 계십니다.

 

 

일체지자(삼마삼붓도)이신 세존께서는 무명의 첫 시작점에 대해서는 모르셨던 것일까?,

아니면 무명의 첫 시작점이란 것은 몰라도 좋은 것이기 때문에 설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혹시 무명은 그 첫 시작점은 열반이 아닌가?,

즉 어떤 존재가 원래는 열반에 들어있다가 번뇌가 생겨서 윤회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닐까?

정말 무명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어떻게 무엇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디면 그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또 무엇이며 그것은 또 어디서부터 나서 어떻게 끝나는 것인가?,

그렇디면 열반의 증득이란 아무 것도 없는 절멸의 상태에 들어간 것인가?,

열반이 그런 것이라면 왜 그런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깨끗이 목욕하고 화환으로 단장한 다음 제물로 바쳐지는 것보다는

진흙 구덩이에서라도 오욕락을 즐기고 죽을 때까지는 살아있는 것이 더 수승한 아닌가?

같은 의문들이 일어나느 것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부처님은 열반은 최상이라고 하셨으며,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렇게 설하고 마실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제게는 있습니다.

 

윤회의 시작은 내가 존재를 입고 있는 한 결코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아니 존재를 상정하지 않으면 윤회의 처음 시작점이라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닐까?

존재를 입지 않고 있는 자에게, 존재의 사슬을 끊어버린 채 머무는 자에게는

그 무엇이 있어서 그 연원을 따라가면 있어야 할 윤회의 시작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닐까?

 

무명에 덮히지 않고 갈애에 묶여서 치달리는 그 사슬을 끊어버린 자에게도,

그가 그러하다면 이미 그라는 존재가 '있고, 없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처럼 존재라는 것을 아예 벗어난 그라면,

윤회의 처음 시작점을 관(觀)할 존재가 성립하지 않거늘, 그러한 그에게만은 윤회의 처음 시작점은

드러난다고 함이 정당할 것인가?와 같이

열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부처님은 세존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정등각자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 무량겁을 십바라밀을 구족하게 닦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습니다.

부처님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설하셨고, 

무명의 시작 혹은 윤회의 처음 시작점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분명하게 설하셨습니다.   

 

무명은 번뇌를 조건으로 일어나고, 번뇌는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사리뿟따 존자의 법문은

윤회의 처음 시작점이라는 대척점에 서있는 '열반'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생각됩니다.

 

정신·물질과 알음알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양상을 넘어시기도 어려운 것이지만

무명과 번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양상을 넘어서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 선 자리에는 '일어남·사라짐(生滅)의 소멸'이라는 구경의 행복인 열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열반'이 '윤회의 처음 시작점'의 대척에 있다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열반은 그 상대나 대척점이나 혹은 대상이나 의지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존의 말씀대로 '알음알이의 소멸'이요, 그러므로 '정신·물질의 소멸'이요,

따라서 '통찰지'도 설 영역이 없고, '무명의 소멸'이요, '번뇌의 소멸'이니 일체의 소멸이라 할

것인 바,

 

열반에 이르러 윤회는 무명은  번뇌는 그 시작, 중간, 끝을 불문하고 철저히 해체되고 소멸할 뿐이니

어떻게 그 상대에 윤회가 있다는 말이 가당하겠습니까?

 

 

   "無時無處에

    無始無終이라.

    나지도 죽지도 않는 이 한 물건"

 

이라는 게송은 잘 읊어진 멋진 한 구절의 계송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나는 것도 죽는 것도 없습니다.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한 물건'이라는 구절은 마음에 걸립니다.

거기에 물건 없으며, 물건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며, 그 자체가 물건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이전에 그 자체라는 것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저는 스승님의 다음과 같은 게송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1)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2)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3)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4)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5)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6)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

 

       나는 말한다. 

 

 

       그것은

 

       7) 의처(依處)를 여의고, 

       8) 전생(轉生)을 여의고, 

       9) 대상(對象)을 여읜다. 

 

     10)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우다나, 빠딸리가마의 품,「열반의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0609

 

 

 

 

 

    

이와 같이 받아 지녔습니다.

 

 

 

이와 같은 상세한 가르침을 주신 사리뿟따 존자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하신 승가에 귀의합니다.

 

 

 

이 「바른 견해 경」(M9)을 사경한 공덕 몫을

31천 존재하는 제도가능 모든 중생들께 회향합니다.

 

또한 긴 시간 법답게 정진한 저의 딸 해란에게

특별한 뜻을 담아 회향합니다.

괴로움과 어려움을 이기고 정진한 정당한 결과가 있기를,,,

본인의 바램을 어려움 없이 성취할 수 있기를,,,

모든 부처님들과 승가와 부처님을 따르는 모든 천신들이 그와 함께 하시기를,,,,

 

회향을 받아

평안하시기를, 행복하시기를,

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고통에서 벗어나시기를, 장애에서 벗어나시기를,

위험에서 벗어나시기를, 원수들에게서 벗어나시기를,

잔혹함을 면하시기를,,,

 

31천 제도가능 모든 중생 장애없이 열반에 이르시기를,,,,,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2015. 11. 8

나무 석가모니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