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마음의 다함

십사(十事)와 오사(五事)에 대한 생각 _ 180717

이르머꼬어리서근 2018. 7. 14. 07:36


※ 이 글은 인터넷 上에 나와있는「인도불교사」등에서 퍼온 글을 인용하여

    소위 십사(十事)와 오사(五事)에 관련된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본 글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고, 어려운 일이지만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 십사(十事)와 오사(五事)에 대한 생각


「인도불교사」는 에띠엔 라모뜨 著, 등 동명의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주로 불교학자들이 저술한

책들입니다. 물경 2,56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불교의 역사서는 다른 일반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사실의 편린들, 탐구, 추론 등이 주를 이룰 수 밖에는 없고, 그럼애도 불구하고 오늘날 보다시피 많은

분파와 다른 전승들로 이루어져 있는 불교교단들의 뿌리에 접근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각자의 전승들은 나름의 특징이 있으며, 자신의 전승들을 다른 전승들보다 더 정통한 것이고,

자신들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행법이나 논장 등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 길고 곡절 많은 역사의 흐름이나 지역적 특성등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을 수용해야 하는 일반인에게는 어떤 것이

부처님의 정법인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100년 베살리에서 그곳의 밧지푸타 비구들로 인한 10가지 사항(十事)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700명의 장로들이 모여 2차결집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이어지는 오사(五事) 등 교단 내 법과 율에 관한 이설(異說)들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면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약 250년 경으로 추정되는 아쇼카 왕 당시, 왕의 비호 아래 목갈리뿟따띳사

장로를 상수로 1,000명의 아라한들이 모여 카타밧투(Katha-vatthu, 論事) 등을 통해 세존의 가르침을

바로 세우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팔정도가 있는 한 열반이 있다." 즉, 팔정도가 있는 한 아라한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 M84, 마카데와 경: http://blog.daum.net/ibakdal/17372509)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겨우 100∼250년 후까지의 시대라 위와 같은 논란들을 정리할 때 아라한이신

분들도 교단에는 분명히 있었고, 그러한 분들에 의해 논란들은 정리되고 가닥을 잡았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교단의 분열이 그친 것이 아닙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동의하지 않고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주장하여, 결국 화합할 수가 없게 되고, 분열되어

간 것으로 불교사는 말합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부처님의 법은 제자들의 바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세존께서 설하신 바대로 사쌍팔배(四雙八輩)의 승가가 있어,


1) 번뇌를 제거하도록 수행하는 승가이며,

2) 거짓이나 왜곡없이 바르게 곧게 수행하는 승가이며,

3) 오직 열반만을 향해 참되게 수행하는 승가이며,

4) 존경받기에 합당하게 수행하는 승가


가 있는 이상  세존께서 설하시고 천명하신 법과 율은 오래도록 세상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들 승가를 잘 공양하고 보호하는 것은 재가자들에게 주어진 소임이요 수승하고

위없는 복밭을 가꾸는 일이요 선업공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1. 법과 율이 사라지고, 비법과 바율을 설하는 자들이 강성해지기 전에


디가니까야 주석서 서문에서 일차대합송(일차대결집)이 있기 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법과 율을 보존하기 위한 배경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계십니다.

                 

   '그래서 (율장「소품」에는)

 

   "그러자 마하깟사빠 존자는 비구들을 물러서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한때 나는 500명의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빠와로부터 꾸시나라로 통하는 대로를 따라 가고 있었다."(Vin.ii.264)라고 설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늦깎이) 수밧다에 대한 부분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 뜻은 「대반열반경」읕 통해서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런 후에 그는

   "도반들이여, 그러니 우리는

 

    1) 비법(非法)이 드러나고 법이 사라지기 전에,

    2) 비율(非律)이 드러나고 율이 사라지기 전에,

 

    3) 비법을 설하는 자들이 강성해지고 법을 설하는 자들이 힘을 잃기 전에,

    4) 비율을 설하는 자들이 강성해지고 율을 설하는 자들이 힘을 잃기 전에,

 

    법과 율을 합송해야 합니다."(Vin.ii.285)라고 말하였다.'


                              (+ 디가니까야 주석서 서문: http://blog.daum.net/ibakdal/17371446)


마하깟사빠 존자를 필두로 5백명의 양면해탈한 아라한들이 모여서 법과 율을 왜 결집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법과 율이 사라질 것임을,

법과 율을 설하는 자들이 힘을 잃고 비법과 비율을 설하는 자들이 강성해지는 그런 날이 올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한 아래와 같이 늦깎기 수밧다의 주장과 같은 무리들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여, 그들이 머지 않아

기회를 포착하여 정법을 사라지게 할 것임을 알고, '법'과 '율'을 확립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세존의 사리를 배분하는 날에

     모여든 중생들과 만 명의 비구 승가의 장로인 마하깟사빠 존자

 

     세존께서 반열반하신 지 칠 일째늦깎이 수밧다가,

 

    '도반들이여, 이제 그만 하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탄식하지 마십시오.

     도반들이여, 우리는 이제 대사문으로부터 잘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당하다. 이것은 그대들에게 적당하지 않다.'라고

     늘 간섭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하면 되고

     무엇이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으면 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였다.

 

 

     그는 이러한 승가의 모임이 다시 있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경우가 있을 것이니,

     사악한 비구들이

    '스승의 가르침은 끝이 났다.'라고 생각하여

     기회를 포착한 뒤 오래지 않아서 정법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법과 율이 확립되어 있는 한 스승의 가르침은 끝이 나지 않는다.

.

     세존께서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6.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이 교법이 오랜 세월동안 오래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

     법과 율을 합송하도록 하리라.'


                                       (+ 디가니까야 주석서 서문: http://blog.daum.net/ibakdal/17371444)

   

   

   

2.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

   

   "아난다여,

    런데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 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 * 대반열반경, D16: http://blog.daum.net/ibakdal/17371230)

    

   

그것을 확립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교법이 오랜 세월 동안 오래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

'법'과 '율'은 합송되었습니다.

   

사악한 비구들이 '기회를 포착한 뒤' 정법을 사라지게 하려면,,,

그 합송된 법과 율을 훼손하고 무너뜨리면 되는 것이고,

   

부처님의 교법을 지키려면,,,,

그 합송된 법과 율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고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악한 자들은,,,,

'사악하다.'라고 하는 이유는 세존께서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세상을 연민하여,

신들과 인간들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법을 설하신 바,

그들은 존재들을 유혹하여 파멸하게 하고, 미워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고, 괴로움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없게 하여 가둬놓고 지배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즐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물질의 감옥에 가둬두고 거기 왕노릇을 하고파 하는 처량하고 처절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거머쥐고 남들도 거머쥐게한 나와 세상이라는 오온, 정신물질은

그 무엇이든 소멸하기 마련이고, 그러하기에 결국 괴로움이며, 그속에 결코 나도 나의 것이라 할 것도

나의 자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황망한 짓을 계속하려 하는 그 심사는 대체 무엇일까요?,,,,

깊디 깊은 갈애요 끊어내지 못한 심연의 쇠살입니다. 

    

살펴보면 그 이전에 우리의 마음 속에 그와 같은 갈애가,, 마라에게 복종하여서라도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이라는 감옥에 갇혀서리도 그것을 즐기고 탐닉하고픈

참으로 뿌리깊은 갈애와 애욕과 쇠살이 우리의 마음 속 깊이 박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보아 존재를 벗어나려는 자를 방해하는 마라도 마라지만, 가만있는 마라를 불러내는

것이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그 어떤 사악한 자들은,,,

위의 말씀처럼 세존께서 입적하시자마자 그와 동시에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은 끝이 났다.'

비록 아라한들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자들의 생각이 모두 다른 것이므로

세존께서 입적함과 동시에 교단은 분열하는 것이며,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며 새로 경을 지어내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그 합송되었다는 법과 율이 정확한지, 후대에 다른 것이 섞여있는지, 오류가 없는지를

당신이 어떻게 알고 확신하느냐고 반문하고, 심지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게 지어진 경이라면

부처님이 직접 설하시지 않은 것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냐고 하기도 합니다. 전해진 니까야에도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들이 설하신 경들도 있지 않느냐 등,,,, 온갖 이유가 다 들러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고 천명하신 법과 율이 없다는 이야기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1)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서 세상에 오셔서 법과 율을 설하셨다는 사실 

2) 그 법과 율은 그 법과 울을 온전하게 성취하셨다고 알려진 500분의 제자들의 동의하에

    합송되고 선언되었다는 사실

   

만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어떤 장난을 치던간에,,,

마라와 그의 유혹에 미혹된 사악한 자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

   

   

   

3. 법인가, 비법인가? _ 단어와 문장들을 경과 대조하고 율에 비추어 봄

   

세존께서는 어떤 비구가

1)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받아지녔습니다.'라는 경우,

2) '장로들과 유명한 스승이 계시는 승가의 면전에서 듣고 받아지녔습니다.'라고 경우,

3)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과 율과 마띠까(논모)를 호지하는 장로비구들

     면전에서 듣고 받아지녔습니다.'라고 하는 경우,

4) '많이 배우고, 전승된 가르침에 능통하고, 법과 율과 마띠까(논모)를 호지하는 한 분의 장로의

     면전에서 듣고 받아지녔습니다.'라고 하는 경우

   

그 어떤 경우에라도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하지도 공박하지도 않은 채로

    단어와 문장들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라고 설하셨습니다.

   

   

경과 율과 견주어 맞지 않다면 '이것은 세존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구가 잘못 호지한 것입니다.'

라고 이것은 물리쳐야 하고,

   

경과 율과 견주어 맞는다면 '이것은 세존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잘 호지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 * 대반열반경, D16: http://blog.daum.net/ibakdal/17371216)

                                                 

   

여기 무엇이 판단의 기준입니까?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단어와 문장들, 그리고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법과 율이 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  두 가지의 문제

   

여기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판단주체 즉, 누가 이런 판단을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그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법과 율이 어떤 법괴 율인가의 문제입니다.

   

1) 당연히 세존의 법과 율에 능하고 성취한 장로비구 혹은 아라한들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다른 무리나 세력이 있어 그분들을 판단주체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경우,

   

2) 다음으로 판단기준이 되는 법과 율이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법과 율이 아닌 다른 것인

    경우

   

에는 어떤 비구가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

그것이 세존의 가르침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일치할 수가 없고 그 근본이 아예 달라져서

서로가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갈라설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이 두 가지의 방법을 따라서 사악한 비구들은 기회를 포착하여 부처님의 정법을 사라지게 하고

승가를 분열시켜 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으로 사악하지만 교묘한 방법을 통해서 정확히 그러한 틈을

만들고 공격하여 승가는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라다운 수작입니다. 

   

   

   

4. 사소한 문제로부터 중차대한 것으로

   

데와닷따는 어린 비구들을 미혹하여 교단에 분열을 일으켰으나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가

이들을 수습하여 다시 데리고 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더욱 높은 계(戒)를 지키자는 것이 그

명분이었습니다. 그 술책이 간교합니다.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서 세상에 머무실 때는 모르는 것은 그분께 물어보면 될 일이었습니다.

사마가마경(M104)에서 니간타 나따뿟따가 임종하여 교단이 분열되었을 때 아난다 존자는 이미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세존을 의지하면서 머무는 자들도 세존께서 돌아가시면

    승가에서 생계에 관계된 것이나 빠띠목카(계목)에 관계된 분쟁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해 세존께서는

   

   "아난다여,

    생계에 관계된 것이나 빠띠목카에(계목)에 관계된 분쟁은 오히려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러나 도[八正道] 도닦음에 관해서 승가에서 분쟁이 일어난다면,

    

    그런 분쟁은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못하고 많은 사람에게 행복이 되지 못하고, 

    많은 신과 사람들에게 손실과 손해와 괴로움을 가져올 것이다." 

   

                                              (* 사마가마 경, M104: http://blog.daum.net/ibakdal/17372698)

    

   

그렇습니다. 아난다 존자와 같이 신실하신 분이나 세존께서도 생계나 계목에 관련한 것을 시작으로

분쟁이 일어나고, 더 나아가서는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가르침의 본체인 도나 도닦음 즉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의 37보리분법에 대해서까지 훼손이나

분쟁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생계나 계목의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도와 도닦음에

대한 훼손과 부인과 그에 따른 분열을 예견하고 계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그 분쟁의 뿌리가 1) 분노하고 앙심을 푼는 것, 2) 상대방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것,

3) 질투하고 인색함, 4) 속임과 간교함, 5) 나쁜 바램과 삿된 견해를 가짐, 6) 자기 견해를 고수하고

그것을 굳게 움켜쥐어 놓아버리기 어려움임을 즉, 그 마음의 오염됨이 분쟁의 뿌리임을 설하고

계십니다.

   

   

세존께서는 반열반을 앞두시고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승가가 원한다면 

    사소한 학습계목들은 폐지해도 좋다."

             

                                                        (* 대반열반경, D16: http://blog.daum.net/ibakdal/17371232)

라고 설하셨습니다.

   

이 부분 주석상 붓다고사 스님의 설명처럼 학습계목 중에 어떤 것이 사소한 것인지는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며, 무엇보다도 율장이 결집될 때 승기는 어떤 학습계목도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500몀의 양면해탈한 아라한이 모였던 그 승가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존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한 것이라 주석은 말합니다.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승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하면서, 예를 들면 스마트폰이나 TV 같은 것들처럼, 어떤 사소한

학습계목은 변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출가자의 계율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승가가 그것을 인정할 때'에 국한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5.십사(十事)에 대하여

   

소금을 비축해도 좋은가로부터 시작하여 얏사 장로가 웨살리 지역을 갔다가 금전 보시를 허용해도

좋은가 등의 문제 등으로 확대되어 700명의 비구승가의 모임으로 제2결짐에까지 이르게 된

십사(十事)의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이라 전해집니다.

    


 1. 뿔로 만든 그릇에 소금을 축적하는 관행(角鹽淨)

 

 2. 수행자는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

     정오를 지나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지난 시간까지 식사시간을

     연장하는 관행(二指淨)

 

 3. 다른 부락(에 가서 음식을 취하는) 관행(他聚落淨)

 

 4. (동일한 교구 안의 다른) 주처(에서 포살을 따로이 행하는) 관행(住處淨)

 

 5. (일을 결정함에 우연히 비구가 전원 모이지 않아, 먼저 참석한 사람들로 결정을 하고

    뒤에 늦게 온 사람들의) 동의(를 예상하여 정족수가 부족하여도 의결을 행하는) 관행

    (隨意行)

 

 6. (석존과 아사리의) 습관(에 따르는) 관행(久住淨)

 

 7. (식사 후에도) 응고하지 않은 우유(를 마시는) 관행 (生和合淨)

 

 8.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관행

     (飮門樓伽酒淨)

 

 9. 테두리에 장식이 없는 방석(의 크기에 관한) 관행 (無緣坐具淨)

 

10. 금,은(을 받는) 관행(金銀淨)


  

   

저와 같이 법과 율에 지식이 천박한 사람이 이 일에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겨우 100년 정도가 지났던 때의 일로써 이미 승가에서

모두 비법(非法)으로 결론이 난 일입니다.

   

아래는 경을 공부하고 있는 저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입니다.

   

   

1) 43가지 근본계율에 어긋난다 _ 사소한 것이 아니다.

   

비구계율 227가지(Vinaya)로까지 확대되기 이전에 세존께서는 사문과경(D2) 등 여러 경에서

짧은 길이의 계 26가지. 중간 길이의 계 10가지(주로 잘못된 행위), 긴 길이의 계 7가지(삿된 생계)의

총 43가지 계(戒)를 설하십니다. 그 중 어떤 것도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며, 나머지 계(戒)들은

이 근본 43가지 계의 정신으로부터 확대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계(戒)에 대한 근본 가르침에서 금과 은을 받지 않는 것을, 요리하지 않은 날곡식이나

나중에 먹을 것을 대비하여 음식재료를 받아 비축하지 않을 것을 설하십니다. 

                                                          (* 사문과경, D2: http://blog.daum.net/ibakdal/17369872)

   

   

2) 몸을 보호하기 위한 옷, 위장을 지탱하기 위한 음식으로만 만족하라고 하셨다.

                       

또한 세존께서는 그 이전에

   

   "대왕이여, 여기 비구는

    몸을 보호하기 위한 옷 위장을 지탱하기 위한 음식으로 만족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이것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자기 양 날개만을 짐으로 하여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비구는 (얻은 필수품만으로) 만족합니다."

  

                                                            (* 사문과경, D2: http://blog.daum.net/ibakdal/17370495)

    

 과 같이 설하십니다.

   

   

3) 먹고 입고 거하는 것에서 두타행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으신다.

   

또한 세존께서는

   

    "칠각지와 두타행을 제외하고

     감각기능의 단속을 제외하고

     모든 것 놓아버림을 제외하고

     생명들의 행복을 나는 보지 못하노라."

   

                                                         (* 수브라흐마 게송: 제2상윳따 17번째게송)

   

와 같이 먹고 입고 거처함에 있어서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 두타행을 수행의 근본으로 설하십니다.

   

   

음식이 상할 때 등을 대비하여 소금을 비축한다든가, 보시자가 불편활 것을 걱정하여 금전을 받는

것도 허용한다든가 하는 것은 아예 관심의 밖에 있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할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4) 계(戒) 자체가 깨달음과 꿰뚫음과 닦음의 대상이다 _ 마음을 어디로 기울일 것인가?

   

세존께서는

   

    "4가지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라고 설하십니다.

   

그리고 그 4가지는 바로 1) 성스러운 계(戒), 2) 성스러운 삼매(定), 3) 성스러운 통찰지(慧), 그리고

4) 성스러운 해탈(解脫)이라고 설하시고, 이 4가지의 연관성에 대해서

   

  " 1] 계를 철저히 닦아서 생간 삼매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2] 삼매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통찰지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3] 통찰지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마음은 바르게 번뇌들로부터 해탈하나니,"

   

                                                     (* 대반열반경, D16: http://blog.daum.net/ibakdal/17371215)

   

라고 설하셨습니다.

   

이같이 세존께서는 계(戒)를 깨닫고 꿰뚫는 것, 계(戒)를 철저히 닦는 것을 깨달음의 시작으로

삼으십니다. 이같은 세존의 가르침을 보면 십사(十事)를 비법(非法)으로 판정한 제2결집에서

700명 승가의 판단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2결집 이후 장로들의 결정에 불복하고 10사를 인정승려 1만여명자신들의

주장에 합당한 것들을 모아 게송형식으로 부처님말씀을 결집('일만송'이라 한다)하였으며,

이들이 제2결집에 참여한 장로들과 제2결집을 따르는 승려들과는 구분되어 대중부를 이루게

되었다.'함은 납득되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계(戒)에 대해서 단순히 받아지니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꿰뚫어야 하고, 철저히 닦아야 한다.'라고 하심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르치시고 선언하신 계(戒)와 그 이유를 성찰하고 숙고하여, 오로지 열반을 향해 마음을

기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야만 계를 '깨닫고', '꿰뚫고', '닦는다.'라는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심지어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성스러운 계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여 긴 세월을 치달리고 윤회했다고 하시는 데에는 참으로 경악스럽고 그렇게까지 설하신 데는

심오한 뜻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5)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세존을 길잡이로,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_ 무슨 법을 찾고 무슨 법을 의지처로 하는가?

   

니까야에서 수 많은 경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 하며, 세존을 귀의처 합니다."

   

                                                    (* 날라까빠나 경, M68: http://blog.daum.net/ibakdal/17372364

   

라고 하고, 세존께서는 이를 그렇해서는 안된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부처님을 찾고 그분의 가르침을 공부히는 것입니까?

진리를 찾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괴로움의 종식을 위해서, 존재의 족쇄를 벗기

위해서, 참된 행복을 위해서,,,, 그래서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긴 세월의 고통을 거쳐 만나게 된 부처님과 그분의 가르침,,,

    

우리들의 법은,,,

세존과 그분의 가르침을 근원으로, 길잡이로 하고, 귀의처로 하고,

다른 이나 다른 이의 교설을 근원으로, 길잡이로, 귀의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라는 의지처, 피난처의 선언은 바로

나는 세존·아라한·정등각자이신 그분과 그분이 가르치고 천명하신 법과 율을 의지처로, 피난처로

한다는 확신과 그것의 자기선언이기도 합니다. 

   

   


6. 오사(五事)에 대하여

   

위 십사(十事)로 인한 상좌부와 대중부의 '근본분열'은 가라앉지 않고 지속되었고 파탈리푸트라

에서 '오사(五事)의 논란'으로 인해 교단의 분열은 급속회 되었다고 합니다,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236년 아쇼카 왕 당시, 왕이 불교승가에 대해 많은 기부를 하자 이에 유혹을

느낀 6만의 비불교도 (外道)들이 승가에 잠입하여 7년간 올바른 포살이 한번도 시행되지 못할 정도

파탈리푸트라의 승가는 혼란해졌고,

   

왕은 분쟁을 피해 갠지즈 강 상류 산 속에 은둔해있던 장로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불러 그의 가르침을 듣고, 승가에 잠입해 있던 비불교도를 색출.환속시키고 포살을 시행하여 승가를

보호하게 하였고, 이에 목갈리뿟따띳사는 1.000명의 아라한을 모아 異說을 배척하고 정통설을 밝히기 위해 카타밧투(Katha-vatthu, 論事)를 정리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제3결집입니다.

   

   

그 즈음 대천( 혹은 마하데와) 비구가 이제까지 논쟁을 해왔던 것을 집대성하여 '5사의 신설'

주장하였으니 그것은, 아라한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한 사건인 바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여소유(餘所誘)-

 아라한은 이미 수행을 통해 스스로 번뇌를 소멸하여 번뇌가 없지만

 마왕이 번뇌를 부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번뇌가 자기 내면으로부터는 안

 생기더라도 외부로부터의 영향으로 번뇌가 있을 수 있으니, 아라한이 어떠한 경우도

 번뇌가 없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둘째, 무지(無知)-

 아라한은 비록 깨달음을 얻어 매사를 이치에 맞게 잘 판단하고 알지만,

 소소한 일에 있어서는 무지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즉 우주의 이치나 인생의 진리는 잘 안다해도 바느질을 하거나 청소를 하는 등 소소한

 일들에 있어서는 경험이 없어서 모를 수 있다는 뜻이다.


 셋째, 유예(猶豫)-

 판단에 따른 의혹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항상 스스로 옳다, 그르다 잘 판단하는데

 혹시 잘못 판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생길 수 있어 자기를 돌아보기도 한다

 것이다.


 넷째, 타령입(他令入)-

 아라한은 남으로부터 인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대대로 스승이 제자를 인정해주듯이

 누군가로부터 아라한이라고 인정받을 때 아라한이 되는 것이니, 결국 스스로 완전한

 것에 비하면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다섯쨰, 도인성고기(道因聲故起)-

 아라한도 고를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중생들은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비록 그 문제를 풀게

 된다 해도 그것을 해결하기 전 까지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성제를 깨달은

 아라한은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곧 해결하기 때문에 고가 없다고 알려졌었다.

 대천은 이에 대해 비록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해도 문제가 발생하고 해결되는 데는

 시차가  있게 마련이고, 결국에는 아라한도 바로 그때는 잠깐이라도 고를 느낀다

 것이다.

   

   

1) 법인가 비법인가? 판단주체의 문제를 들고 나오다

                                                        _ 혼란의 주된 공격기반을 마련하다.

   

세존께서는 대반열반경에서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어떤 비구가 이것이 세존께서 설하신 법이라고 주장할 떼

그것이 법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해 보고

율에 비추어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 대반열반경, D16: http://blog.daum.net/ibakdal/17371216)

   

단어와 문장들, 그리고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법과 율이 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 십사(十事)는 사소할 수 있는 생계의 문제로 위장한 공격,

                                              오사(五事)는 뼈가 아플 마라의 준비된 주된 공격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판단주체 즉, 누가 이런 판단을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그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법과 율이 어떤 법괴 율인가의 문제입니다.

   

1) 당연히 세존의 법과 율에 능하고 성취한 장로비구 혹은 아라한들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다른 무리나 세력이 있어 그분들을 판단주체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경우,

   

2) 다음으로 판단기준이 되는 법과 율이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법과 율이 아닌 다른 것인

    경우

   

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둘 중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첫 번째 '판단주체'의 문제입니다. '판단주체'의 정당성을 부인할 수

있다면 그들에 의해 결집된 법과 율도 부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오사(五事)는 아라한이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면

7백명의 아라한이 내린 결정도 오류가 있을 수있으며, 그들이 결정한 경율 가운데에도 잘못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비법이라고 규정한 것 중에도 법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본질적인 공격 기반이 되는

'판단주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십사(十事)는 이미 설해진 법과 율로써 제압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오사(五事)는 '아라한'을 왜곡하고 폄훼하여,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선언하신 법과 율의 응당한

판단주체가 되는 아라한들을 뿌리부터 흔듦으로써,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선언하신 법괴 율'의 결집 자체가 흠결이 있을 수 있다고 공격하여 틈을 만든 후, 이제 이설(異說)과 요설(妖說)로써 세존께서 설하시지 않은 비법과 비율을 세존의 가르침이라

드러내고 내세움으로써 세존께서 '내가 가고 난 후에 스승이다.'라고 하신 법과 율의 실체를

하나씩  지워나가고,

   

깨달음의 기본이 되는 계율로부터 시작하여, 세존께서 선언하신 법의 본체인 '도와 도닦음

(37보리분법)'을 훼방하고 훼손하는 중대한 일에 대문을 활짝 열어 놓는 짓을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소한 것으로부터 중차대한 것까지 순서대로 파괴해 나가는 토대를 구축한 것이며, 참으로 사악한

의도를 드러내고야만 도발이요 혼란과 분열의 토대를 구축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2) '아라한'에 대한 궤변 _ 아라한, 마음이 해탈하여 괴로움을 소멸한 자

   

■ 아라한의 몽정(夢精)?

   

「 마하데바(대천)라는 아라한이 아침에 옷을 벗어서 시종승에게 빨도록 명했는데

    시종승이 보니까 옷이 정액으로 젖어 있었다. 시종승은 황당했다. 어떻게 아라한이 몽정을

    하느냐는 것이다. 자나 깨나 번뇌를 여읠 수 있어야 아라한이다. 더구나 누진통을 했다면 몽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진통을 이루지 못했다면 아라한은 아닌 것이고.

   

    그래서 시종승이 물어보니 마하데바가 말하기를...

   “아라한도 번뇌가 일어날 수 있지. 더구나 잘 때에는 마구니의 힘에 의해 몽정을 할 수도 있지.

    아라한이라고 별거냐?” 라는 식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더 황당해진 시종승이 마하데바의 이야기를 승가에 하자 이 건 큰 문제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쑥덕쑥덕, 그러다가 공론화까지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사(五事)의 논란을 일으킨 마하데바(대천)이라는 비구의 일화라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라한의 몽정, 마왕이 번뇌를 부착할 수 있다 운운과 관련된 얘기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 아라한을 왜곡함

   

오사(五事)는 아라한이라도 1) 잘 때처럼 마음챙김을 놓은 경우 몽정을 하는 등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번뇌가 일어날 수 있다, 2) 어떤 일에는 무지할 수 있다, 3)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4) 스스로 완전한 것에 비하면 완전하지 않다, 5) 잠깐이라도 고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다 등의 궤변으로

'아라한'의 본 뜻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1)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그의 마음은

    잠잘 때 꿈에서 펼쳐지는 정신물질(오온)이라해도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계정혜를 닦고 꿰뚫음으로 마음 속 깊은 곳 잠재성향에까지 뿌리박힌 갈애를 알고 보며

    바로 그것까지를 알고 보아 뿌리채 뽑아버린 것입니다. 아라한이신 세존께서 잠을 주무실 때는

    아라한이 아니요, 세존, 정등각자가 아닌 분이 되는 건가요?.

   

    수행자가 닦음이 못미쳐 몽정을 하는 수도, 마라의 미혹에 빠지는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일이 있다면

    자신의 수행과 마음챙김의 부족함을 돌아볼 일이지 그런 정도의 닦음이라면 그는 '아라한'이

    아닌 것입니다.

   

2) 아라한은 바느질도, 청소도, 대장장이 일도 그 무엇도 잘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어떤 일에는

    무지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은 '취착없는 완전한 열반',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을 증득한 자를

    일컬음입니다.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한 자'를 일컬음

    입니다. 사성제를 꿰뚫어 알아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 존재에 기인한 번뇌, 무명에 기인한

    번뇌들로부터 벗어난 자를 일컬음이요, 존재의 족쇄를 벗어 존재를 소멸한 자요, 윤회를 끝낸자요,

    탐진치가 다한 자요, 괴로움의 소멸을 성취한 자입니다.

   

    한마디로 존재의 문제, 정신물질의 문제를 해결한 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장부일대사입니다.

    나머지는 끝없이 증장할 수도 소멸할 수도 있는 정신물질의 현상이요 드러남일 뿐입니다.

   

    그 무엇도 잘 하고 모르는 것이 없는 항상 일체지가 현전하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아라한이라 하여

    완전한 자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면 이것은 니간타 나따뿟따의 교설과 같은 것입니다. 정신물질을

    벗어남을 말하면서 정심물질이라는 말뚝에 자신을 묶어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일체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생들의 '선택'을 그것에 따른 인과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존재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  그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라한이라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바느질과 청소와 대장장이와 고기잡는 법 등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라한이 마음을 기울이면 최고의 바느질, 최고의 대장장이, 아마도 세상을 지배하는 전륜성욍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 마음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직 괴로움이 일어나고,

    오직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알고 보기 때문입니다. 무상한, 무한한 정신물질의 일어남 사라짐일

    뿐이기에 다시는 그 일어남사라짐에 덧없이 들지 않습니다. 혹여 들더라도 그것은 인과를 수순할 뿐

    인 것이며,,, 거기에는 이미 '나'나 '나의 의도'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3) 아라한도 혹시 자신이 잘못 판단하지 않았을까라는 의혹이 있어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성취한 자'의 마음은 그 마음의 모든 심찰나의 속행과정에서 마음의 오염원을 벗어난 것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끝없는 정진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잘못 판단하지 않았을까' 즉

   오온, 정신물질에 갈애를 일으켜 그것을 거머쥐지 않았는가라는 끝없는 자기 반추의 연장성 상에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신의 행위, 말, 마음(의도)로써 행위를 하고, 그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그 일어나는 마음에 대한

   스스로의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서 그가 성취한 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그

   '마음챙김'을 놓아버린 그 순간 그는 '존재를 입게'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 느낌, 마음 법의 네 가지 마음챙김의 획립과 반조가 항상하여 자나깨나 떠나지 않는 것,

    즉 세존께서 설하신 바,


       "'내가 이처럼 즐겁게 머물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지만 

         내가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독려할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

         그러니 나는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독려하리라.'라고


         그리하여 그는 괴로움 속에서 자신을 독려한다

         그가 괴로움 속에서 자신을 독려할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괴로움 속에서 자신을 독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그 비구가

         괴로움 속에서 그 자신을 독려했던 그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괴로움 속에서 자신을 독려하지 않는다." 

                        

                                                ( * 데와다하 경, M101: http://blog.daum.net/ibakdal/17372675 )


    와 같이 종국에는 그렇게 애써 하지 않아도 절로 마음의 오염원들로 마음 기울이게 되지 않아

    청정함에 머무는 것, 그것이 아라한인 바, 어째서 그것이 완전하지 않은 자의 반증이라는 말이

    되는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 그것이야말로 불완전의 반증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떤 경계를 얼핏 보았다고 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야말로

    넋을 놓아버리고, 다시 늪에 빠진 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4) 누군가로부터 아라한이라고 인정받을 때 아라한이 되는 것이니, 결국 스스로 완전한 것에 비하면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누군가로부터 아라한이라고 인정 받을 때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아라한이라고

    누구도 인정할 자가 없다하더라도 그는 스스로 분명히 압니다. 자신이 성취했다는 것을.

    해탈하여,, 해탈지견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라고

    설하시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아라한을 알아 볼 것입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여 그는 '나는 아라한이 되었

    다.', '나는 아라한이다.'라고 외치는 일도 읊조리는 일도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알아 성취하였지만

    어떤 아라한도 열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열반을 열반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안다. 

     

          열반을 열반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알아

          1) (자신을) 열반이라 생각하지 않고,

          2) (자신을) 열반에서 생각하지 않고,

          3) (자신을) 열반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4) 열반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열반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 * 뿌리에 대한 법문 경, M1: http://blog.daum.net/ibakdal/1737152)

   

    거기에는 이미 '그'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열반'은 그 이름이 '열반'이기 때문입니다.

    범(梵)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며, 범아일여(梵我一如)도 아닙니다. 그래서 '일체'도 아닌 것입니다.

   

5) 비록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해도 문제가 발생하고 해결되는 데는 시차가  있게 마련이고,

    결국에는 아라한도 바로 그때는 잠깐이라도 고를 느낀다.,,,,

   

    유여열반인 아라한이 잠깐이라도 고를 느끼지 않는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6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육입에서 오온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오온을 나 등으로 취착하지 않을

    뿐인 것입니다.

   

    법답지 않은 것을 만나고,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자도 만나고, 탁발을 나가서 공양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고통이 일어나지 않늗다면 그가 목석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

    습니까? 마음이 없는 유여열반인 아라한은 없습니다. '대상을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대상이

    있는 한 그것을 아는 마음이 있고,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러한 '오온을 바로 보아' 해탈한

    마음입니다. 바로 보기에 대상이나 느낌이나 인식이나 샹카라나 알음알이를 거머쥐고 결코

    단 한순간이라도 그에 끄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아라한도 잠깐이라도 고를 느끼기 때문에 완전한 자가 아니라는 말은 '완전한 자'가

    무엇인지를 오독하고 훼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강가의 돌을 아라한이라고

    예경해야 맞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몸 담고 있는 한 '오직 괴로움이 일어나고, 오직 괴로움이

    사라진다' 고 합니다. 일체가 괴로움의 산물이거늘 고를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그 괴로움을 바르고 완전하게 벗어나는 법을 성취한 것입니다. 아라한도 행복한 적도

    괴로운 일을 당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는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인과를 수순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행복과 괴로움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라한이냐고요?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아라한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대로 판단하느냐고요?

경에 나와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수도 없이 아라한이 어떤 존재인지를 상세하 설해놓으셨습니다.

'법은 세존에 의해 장 설해졌다.'라고 세존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지자라면 각자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아라한이 아니라도, 아라한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3) 아라한에 대한 궤변으로 훼방할지라도 

                                          세존께서 설하신 법과 율은 없어지지 않는다.    

   

위 오사(五事)는 차례데로 1)은 아라한의 마음챙김에 대한 훼방, 2), 3), 5)는 아라한의 '완전함'을

빙자한 성취에 대한 오독(誤讀) 내지 훼방, 4)는 아라한이 어떻게 성취되는지에 대한 훼방으로써

그 각각이 모두 아라한에 대한 궤변으로, 세존의 가르침에 의한 위없는 성취 즉 '해탈'과 '열반'을

헛되고 부질없는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 교묘하게 고안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스운 것은 이러한 사악한 궤변들이 정작 아라한들 향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류자도, 일래자도, 불환자도 아닌 범부들이나 재가자들 혹은 출가자라 할지라도 유학들을 향한

미혹이요 미끼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도발을 하는데는 필경 거기에 따른 이득이나 만족이

있기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같은 사악한 장난이 통했을 때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법과 율을 부인하고,

승가를 인정하지 않으며, 법과 율이 아닌 것을 세존의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세존의 법과 율을

차례로 지워나가고, 법과 율에 법과 율이 아닌 것을 섞어서 세존의 가르침을 만나려고해도 점점더

어렵게 만들어 나간 것입니다.

   

   

■ 지워지지 않고, 멈추지 않는 것

   

아라한에 대한 궤변으로 무지한 이를 미혹하거나 미혹하는데 성공햇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가르치고 천명하신 법과 율이 없게 할 수는 없습니다.

                            

1)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서 세상에 오셔서 법과 율을 설하셨다는 사실 

2) 그 법과 율은 그 법과 울을 온전하게 성취하셨다고 알려진 500분의 제자들의 동의하에

    합송되고 선언되었다는 사실

   

만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어떤 장난을 치던간에

다시금 마라와 그의 유혹에 미혹된 사악한 자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

법을 찾는 자는 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

   

   

     "1)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2)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3) 시간이 걸리지 않고,

      4) 와서 보라는 것이고,

      5) 향상으로 인도하고,

      6)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라고 하고, 다시 

     '불사(不死)의 문은 활짝 열렸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 * 자나와사바 경, D18: http://blog.daum.net/ibakdal/17371246)

   

천신이나 범천들도 그렇지만 세존께서는 이같은 법의 공덕을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마라와 사악한 자들이 어설픈 짓으로 법을 지우려 하여도 뜻대로 될 수 없습니다.

법은 여래님들에 의해서, 세존·아라한·정등각자이신 석가족의 성자 고따마 부처님에 의해서

   

존재들을 연민하여 설해지고 천명된 것입니다.

   

위력이 삼천대천세계를 뒤덮고도 남는 것이며, 

마라 따위나 그에 미혹한 어리석은 자들이

거룩한 법을 훼손할 수도 세존께서 굴리신 법의 바퀴를 멈추게 할 수도 없습니다.

   

      "셀라여, 나는 이니

       가장 위대한 법왕입니다.

                              

       법으로써 바퀴를 굴리나니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바퀴를."

   

                                                          ( * 셀라경, M92: http://blog.daum.net/ibakdal/17372578)

   

   

형성된 이 모든 것 소멸하기 마련이지만, 부처님께서 세상을 연민하여 설하신 거룩하신 법은

오래도록 세상에 머물 것입니다. 붓당 사사낭 찌랑 띳따뚜∼ ((()))

   

   

   

7. 화쟁(和爭)에 대하여

   

1) "화합하고, 언쟁하지 말고, 닦아라."

   

■ 자신을 칭송하고 남을 비난하지 말고,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과 율만을 말하라.

   

세존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경」(M103)에서

         

1. 세존께서는 '연민하는 분이시요, 존재들의 이익을 바라시어, 연민으로 법을 설했다.'라고

    천명하시며, 내내 '화합하고, 언쟁하지 않고닦을 것'을 설하십니다

                

2. 세존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 그들이 비구대중이든 재가자든 간에 본 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1) 그들끼리 세존의 가르침을 두고 논쟁을 하거나,

    2) 다른 자가 계를 범하고 율을 어길 때,

    3) 상호비방하거나, 비열한 견해를 표출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주거나, 불쾌감이 생기게 하거나,

        반감이 생기게 하는 일이 있을 때,

                

    자신을 칭송하고 남을 비난하지 않고, 오직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과 율만을 말하고,

    그에 의해서 서로 화목하고 논쟁을 중단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여 상대를 해로움에서 벗어나 유익함에 굳건하게 머물 수 없는 경우리면

    그들에게 무관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세존께서는 「사마가마 경」(M103)에서

  

ㅇ 분열의 요체

   

1) 교의(법과 율)를 앎에 대해서 나만이 제대로 알고 있고 상대는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

2) 위 앎의 문제 다음에는 수행(도닦음)의 방법에 대해서 나만이 맞고 상대는 틀린다라고 주장하는 것

3) 말의 일관성에 관한 시비

4) 선후의 정당성에 관한 시비

5) 허점(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이기고 짐을 말하고 당장 해명을 할 것을 요구함

   

에 있음을 설하십니다.

   

   

ㅇ '분열의 뿌리'

   

1) 분노하고 앙심을 품는 것

2) 상대를 경멸하고 업신 여기는

3) 질투하고 인색

4) 속임간교

5) 나쁜 바램삿된 견해를 지님

6) 자기 견해를 고수하고, 그것을 굳게 움켜쥐어 놓아버리기 어려움

   

의 6가지 즉, 분란을 일으키는 자의 마음의 오염됨임을 설하십니다.

   

   

ㅇ 분열의 징조

   

1) 스승(부처님)을 존중하지 않고 불손하게 대하며,

2) 법을 존중하지 않고 불손하게 대하며,

3) 승가를 존중하지 않고 불손하게 대하며,

4) 공부지음도 성취하지 못함임을 설하십니다.

   

부처님과. 그분의 가르침과, 승가에 불손하게 대하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이요,

그같은 마음을 지녔기에 그 공부지음도 성취를 할 수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바로 이들이 승가에 분열을 일으킨다고 설하십니다

  

                                                                  

■ 화합을 위해 '6가지 기억해야 할 법'으로

                                      사소하건 중대하건 감내하지 못한 일이나 분쟁이 없다.

   

세존께서는 이어서 동료 비구들에게 호감을 주고 공경을 불러오고 도움을 주고

분쟁을 없애고 화합하고 단결하게 하는 '6가지 기억해야 할 법'을 설하십니다. 

   

1) 동료 비구들이 면전에 있건 없건 그들에 대해 몸의 업으로 자애를 유지하는 것

2) 동료 비구들이 면전에 있건 없건 그들에 대해 말의 업으로 자애를 유지하는 것

3) 동료 비구들이 면전에 있건 없건 그들에 대해 마음의 업으로 자애를 유지하는 것

4) 법답게 얻은 법다운 것들이 있을 때, 그것이 비록 발우에 담긴 것일지라도 

    그렇게 얻은 것들을 공평하게 나누어 수용하고, 계를 잘 지키는 동료 비구들과 함께

    나누어서 사용한다.

5) 동료 비구들이 면전에 있건 없건,

    훼손되지 않앗고, 뚫어지지 않았고, 오점이 없고, 벗어나게 하고, 현자들이 찬탄하고,

    취착이 없고, 삼매에 도움이 되는,

    그런 계(誡)들을 그 동료 비구들과 함께 동등하게 구족하여 머문다.

6) 동료 비구들이 면전에 있건 없건,

    성스럽고, 출리로 인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바른 견해가 잇으니

    그 바른 견해를 그 동료 비구들과 함께 동등하게 구족하여 머문다.

   

                                                 ( * 사마가마 경, M104: http://blog.daum.net/ibakdal/17372702)

   

   

2)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것이 가톨릭이든,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불교도 마찬기지로 종교들은 생긴 이래로 분열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 그속을 들어가 보면 더 세세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 분열의 과정에서 서로 피를 흘리기도 하고,,, 지금도 전쟁과 학살과 학대의 근본원인을 들어가 보면

심지어는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다른 전승 때문인 경우인 것을 매일 목도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류의 미래에서 언젠가는 이 서로 다른 종교와 믿음이라는 것도 자의로든 타의로든 정리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짐작이 듭니다. 그럴 수 박에 없는 운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맏음을

버릴 것을, 혹은 자신이 믿는 신을 버리고 다른 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지 않으면 폭력 앞에 목숨과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하는 그런 일이 생길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때까지의 신이 아니라

어떤 지성이나 집단이나 새로운 신념이나 새로운 시스템이나 그를 기확한 자들이 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도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100∼250년이 지나서 위 십사 혹은 오사 등을 통해 상좌부와 대중부의

'근본분열' 이래로 그 안에서도 각각 더욱 분열한 것을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명맥을 이어

내려오는 전승들도 모두 그 역사의 산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른 경, 다른 율, 다른 논장, 다른 전통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불교가 서양으로 건너가

한 세대를 풍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내역을 보면 상좌부 불교, 동양권의 대승불교, 티벳불교

등이 그것도 각 나라의 각 교단의 각 스승들의 전승들이 각각 전파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대하는 서양인들도 어리둥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 물경 160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지고 토착종교로 때로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습속화

되어온 자취를 가지고 잇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가톨릭도 기독교도, 이슬람도 그 아래 속속들이 갈린 분파들은 서로 화해할 여지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좌부 불교(소승불교)가 대승불교와 하나의 계율과 종지(宗旨)로

합할 일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각기 다른 스승들의 가르침끼리라 하더라도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보면 그럴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 갈래와 분열의

뿌리와 역사는 너무 깊고, 각 교단들은 교단대로 탄탄히 자신들이 맞다는 자부와 전승과 이론 및 수행

체계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 누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또 꼭 그렇게

하지 않이도 공양하고 보시하는 믿음과 신념에 가득찬 재가신자들이 많이 있다는 도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세존의 말씀대로 생계나 계목에 관련된 것들 중 사소한 것은 일부 다르더라도,,,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의 37가지 도와 도닦음에 대한 것만은

지켜지기를 바라고...  분쟁이 없기를 그것으로는 화합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 법을 지켜 나감

   

교단이 분열해 나감에 있어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아라한들께서 정리를 하셔도 그치지 않았던

일입니다. 앞으로도 더욱더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법과 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스러운 법과

율은 500 아라한들의 1차대합송 등을 통해 환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날은 누구나 인터넷에서도

삼장의 내용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복된 세대이기도 합니다. 모든 가르침을 다 볼 수 있으니,,,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그런데 만일 그대들에게 

   '나는 성가실 것이고 저 사람도 괴로울 것이다. 

    저 사람은 분노하고 앙심을 품을 것이며 

    자기 견해에 국집하여 쉽게 그것을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을 해로움에서 벗어나서 유익함에 굳건히 머물도록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되면

    그 사람에게는 무관심해야 한다." 

   

                                     ( * 어떻게 생각하는가 경, M103: http://blog.daum.net/ibakdal/17372694)

   

라고 설하셨습니다. 그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응당 할 바를 하고 노력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것을 생각하지 말고 '무관심'하라, 즉 그냥 가만히 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위 '시절인연'이 무르익을 때가지 그냥 두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곳에 가서 혹은 맞서서

이것은 법이 아닙니다. 율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그것은 세존께서 가르치신

도와 도닦음이 아닙니다.,,  등등의 말이나 인위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를 두고 '세존께서는 왜 자애와 연민이 없으십니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면 무엇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에 신경 쓰지말고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법과 율을 따라 수행을 잘 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른 자는 우물을 찾아가고, 어둠에 진저리를 차는 자는 빛을 찾아 가는 법입니다.

우물을 찾는 자에게 우물은 드러나고 빛을 찾는 자에게 빛은 드러납니다.

   

목마름을 모르는 자에게 그럴 일도 없지만 우물이 다가가도 소용이 없고,

어둠에 갇혀서 밤이 낮이라고 거머쥔 자에게 태양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분열의 그늘 _ 마라의 성취

   

세존께서 가르치시고 천명하신 법과 율은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 2562년이 지난 오늘에도

가을 하늘의 태양처럼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귀하고 비밀스러운 것은 숨겨진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항상 있는 것인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과 율을 만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훼방과 분열의 그늘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마라는 그가 바라는 바를 성취했고 성취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사람들, 혹은 출가자라 할지라도 각기 다른 마음 기울임과 증득과

성취를 향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이는 다섯 가지 장애를 벗어나지 못한 채 머물면서도 증득을 이야기

하고, 어떤 이는 삼매 얻은 것을 증득으로, 어떤 이는 초선∼제4선의 선정을 증득으로, 어떤 이는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혹은 비상비비상처에 머묾을 증득으로, 혹 어떤 이는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온의 해탈을 증득으로 그 각각의 증득으로 세존의 가르침대로 '구경의 성취'를

증득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 그 어떤 성취도 '열반'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로써 윤회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성취나 공덕이 진실한 것이어서 천상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존재를 벗어남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이것들을 위해 법을 설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경계하시고 그것을 넘어서

괴로움의 소멸을, 존재의 소멸을 설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마라는 성취했고 성취하고 있습니다.

   

늪에 빠진 자가 같이 늪에 빠진 지를 구해낼 수 없습니다. 같이 죽습니다.

늪에서 온전히 나온 자가 손을 내밀어 늪에 빠진 자를 구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늪에 깊이 뻐져 허우적거리면서, 이것이 내가 증득한 길이요, 바르게 전승된

길이요, 세존께서 설하신 길이니, 이같은 방법으로 당신을 구할 수 있다고,,, 마치 늪에서 빠져나온

자처럼 말합니다. 여기서도 마라는 성공했습니다.

   

   

■ 세존의 가르침은 이후 역사를 따라 함께 발전되고 비로소 성숙해졌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정등각을 이루시고 법을 설하실 때부터 45년간 법을

설하신 후 입적하실 때까지 그 설하신 내용이나 설하심의 깊이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이를 부인합니다. 점점 체계화 된 것이라고 합니다.

35세에서 80세까지 45년간 법을 설하시면서 어떤 부분은 그렇게 보이는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의 그것과 같이 그것은 45년에 걸쳐 곡절을 거쳐 서서히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바르게 완전하게 깨달은 상태에서' 완전하고 흠없는 법을 선언하셨습니다.

참으로 백겁에 만나기 어려운 세존·아라한·정등각자의 특이한 모습입니다.

   

   "그들 사문‧바라문들은 바르게 완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바르게 완전히 깨달았다.'라고 선언했다. 

   

    사악한 자여,

    그러나 나는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상태에서 '나는 정등각자이다.'라고 선언한다."

   

                                               ( * 범천의 초대 경, M49: http://blog.daum.net/ibakdal/17372199)

   

   

그분께서 '진리'라고 선언하신 사성제도, 37가지 도닦는 법도 그 45년 동안 변하거나 축차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 45년간 똑 같습니다. '오온을 바로 보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보부터, 미음이, 해탈하였다.'라는 오온해탈의 법이나, 사성제의 뒷면을 이루는 연기(緣起)

법이 그 어느 것도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설해진 것이었습니다. 중간에 발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세존의 법은 그 '단어와 문장'이 그 '뜻'이 8만4천 법문이라하여도 다 그 '맛;이 '한 맛'입니다.

그 맛이 달라지거나 변한 것이나 나중에 더욱 숙성되었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입적하신 후 논장(아비담마)의 성립에 따라서 비로소 불충분힌 부분이 보완되었고 성숙해졌다?,,,

경장에서도 아비담마나 마띠까(논모)는 세존에 의해서 언급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후 다양한

논장에 의해서 법이 보완되고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세존을 부인하는 언사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법을 설하셨습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를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비유히면 '집'과도 같습니다. 아비담마는 그 집을 짓기 위한 '벽돌'과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존께서는 '세상의 인습적인 표현'을 빌어서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비담마가 마음, 마음부수, 물질, 열반이라는 4가지 장으로 설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세존께서 설하심이 세상과 세상에서 벗어남이고, 세상은 정신, 물질말고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비담마의 구성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러나 아비담마가 구경법이요, 진제(眞諦)요, 설하신 법은 속제(俗諦)여서 아비담마를 모르고는

실로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모른다함이나 아비담마가 가장 수승한 법이라고 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생각됩니다. 그전에 진제와 속제라는 말 자체가 어리석음의 소산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어떤 이가 집을 두고 저것은 벽돌이라고 함은 집의 효용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벽돌을 들고 이것이 집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을 공부하는 자가 벽돌까지 안다면 이는 칭찬받을 일입니다.


세존께서 경우에 따라 설하신 법을 두고, 이제 그 제자들이 설하신 법에 따라 그를 깊이 탐구하여

법을 분류하고 그 쓰인 벽돌들, 언어들까지를 탐구하고 공부해 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해석에 있어서 그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것은 그야말로 여래의 영역에 속하는 일을

힘을 다하여 추론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해석의 차이로 승가가 분열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르치고 천명하신

법과 율이 있기에 얼마든지 그 안에서 화합하고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 일이고, 구분하기 어려운 것은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더 수행하여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침을 바탕으로 수행하여 스스로 자득(自得)하면 되는 일인

것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른 '아라한'이 '붓다'를 이룬 것은 아닙니다. 만일 어떤 이가 부처님과 같이

'정등각자'인 '여래'가 '일체지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붓다가 되기를

서원하고 십바라밀을 닦아가면 될 일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 어디에도 비록 아라한 들일지라

하더라도 본래의 잠재성향이 다른 것은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끼리 서로 다투는 법을

본 적이 없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할 만큼 '세존에 의해 법은 잘 설해졌다.'고 세존께서는

항상 설하신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비담마가 없다고 하여 법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법이 없다면 아비담마 즉, '법에 대하여'도 없습니다. 벽돌을 잘 알고,, 벽돌이

수북하게 쌓여있다하더리도 집이 되려면 그것으로 집을 '지어야'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집이 주는 그늘과 안식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세존께서 삼보의 공덕을 설하심

   

위없는 스승이신 세존께서는 스스로 친히 이렇게 수없이 설하셨습니다.

한 마디도 헛됨이 없는 그분께서 그렇게 설하신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여 그 법문으로 긴 글을 맺고자 합니다.

   

   

1) 부처님에 대하여


    이띠삐 소 바가와 -                     그 거룩하신 세존께서는

 

    아라항                                         1. 모든 번뇌로부터 떠나

                                                             사람과 천신, 범천들의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시며,

 

    삼마- 삼붓도                               2. 알아야 할 모든 법들을

                                                             스스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시며,

 

    윗자- 짜라나삼빤노                     3. 지혜와 실천을 모두 구족하신 분이시며,

 

    수가또                                          4. 바르고 훌륭한 말씀만을 하시는 분이시며,

 

    로까위두-                                    5. 모든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시며,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 라티      6. 제도할만한 이들을 제도하시는 데

                                                  가장 으뜸이신 분이시며,

 

    삿타- 데와마눗사- 낭                  7. 천신과 인간의 진정한 스승이신 분이시며,

 

    붓도                                              8. 사성제의 바른 법을 깨달으신 분이시며,

 

    바가와                                         9. 여러가지 공덕을 모두 갖추신 분이십니다.



2) 법(담마)에 대하여


    스왁- 카- 또 바가와따- 담모            1. 세존께 의해 잘 설해진 가르침이며,

 

    산딧티꼬                                            2.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가르침이며,

 

    아깔- 리꼬                                         3. 즉시 결과를 주는 가르침이며,

 

    에히빳시꼬                                         4. 와서 보라고 권유할만한 가르침이며,

 

    오빠나이꼬                                         5. 자기 안에 머물도록 인도할만한 가르침이며,

 

    빳짯땅 웨디답보 윈-뉴-히                 6. 현자들이라면 각자 알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3) 승가에 대하여


                                                              부처님의 제자들인 승가는  

 

    숩빠띠빤노                                        1. 번뇌를 제거하도록 수행하는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승가이며,

 

    우줍빠띠빤노                                     2. 거짓이나 왜곡없이 바르고 곧게 수행하는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승가이며,

 

    - 얍빠띠빤노                                  3. 오직 열반만을 향해 참되게 수행하는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승가이며,

 

    사- 미- 찝빠띠빤노                      4..존경받기에 합당하게 수행하는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승가입니다.

 

 

    디당 짯따- 리 뿌리사유가- 니       네 쌍의 여덟 분들이 계신

    앗타뿌리사뿍갈라-                            그 부처님의 제자들인 승가는

    에사 바가와또 사- 와까상고

 

 

    아- 후네요                                         5. 멀리서 가져온 공얌물을 보시받기에

                                                                   합당한 승가이며,

 

    빠- 후네요                                         6. 손님들을 위한 공양물을 보시받기에

                                                                   합당한 승가이며.

 

    닥키네요                                            7. 내생을 위해 베푸는 공양물을 보시받기에

                                                                   합당한 승가이며,

 

    안- 잘리까라니- 요                           8. 합장하여 올리는 예경을 받기에

                                                      합당한 승가이며,

 

    아눗따랑 뿐 냑-켓땅 로깟사              9. 세상의 위 없는 복밭인 승가입니다.

                                                     

                                           ( * 상윳따 니까야, 제11상윳따, 3번째 경, 다작까숫따, 깃발 꼭대기 경)



부처님의 법이 오랫동안 세상에 머물기를,,,  ((()))


붓당 사사낭 찌랑 띳따뚜

붓당 사사낭 찌랑 띳따뚜

붓당 사사낭 찌랑 띳따뚜




2018.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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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인터넷상 인도불교사 등의 인용을 별첨합니다.


1. 십사(十事)


■ 검소한 생활원칙과 소금비축 허용의 시비


출가자들은 하루 한번 탁발하여 한끼의 공양을 했다.

그런데, 그 음식이란 한 집에서 잘 요리한 것이 아니라 너무 싱거운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소금이 필요했고, 소금은 상하는 것이 아니니까 한꺼번에 많이 얻어다 놓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소금을 얻어다가 비축해 놓고 먹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데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날 먹을 음식만을 탁발하는 것을 철저히 지켜왔었다.

물론, 인도라는 지역이 워낙 무덥기 때문에 여러집에서 탁발하여 이것저것 섞인 음식을 남겨두면

상할 염려가 있다는 점도 이런 생활수칙(律)을 지키게 하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모든 탐욕을 버린 출가수행인이 무소유적인 삶을 지키려면,

음식이든 옷이든 어떤 재물도 비축하지 않는 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복도 한 벌만 갖고 살아가는 당시의 수행인들은 빈민정도의 경제생활을 유지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검소한 삶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던 교단내에 소금비축에 대한 시비가 일어났던 것이다.

어쩌면 아주 작은 양의 소금을 남겨두는 정도였다면 문제는 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많은 양의소금은 음식일 뿐만아니라 재산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계율을 철저히 지키던 농촌과 산간의 수행인들은 '한꺼번에 많이 얻어 오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부처님께서는 하루 먹을 것만을 얻어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이렇게 반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우리도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몇시로 정할 것인가, 식사시간은 몇시로 할

것인가 등으로 여러가지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때마다 의논을 통하여 맞추어 나가게 되는

경유를 많이 겪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런 의견차이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한걸음 나아가자니까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라고도 하겠다.


이처럼 당시 의견대립이 일어났던 것들을 보면 계율에 대한 소소한 문제제기였지

계율자체가 근본가르침을 벗어났다고 문제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교단내의 이런 논쟁

단순한 이익다툼과는 달랐다. 나름대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함께 가는 구도의 길'에 충실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견해차이라 하겠다.


어찌됐든 이렇듯 소소한 계율에 대한 이견들이란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고 크게 문제될 것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문제가 공식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된 것은 석존 입멸후 100년, 상업이 발달한 베살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밧지풋타카 비구의 10사 제기-논란이 되는 금전보시 허용문제


주로 쟁론이 되었던 소소계는 크게 10가지 정도였고 베살리 출신의 밧지풋타카라는 비구는 그에 준해서 제1결집 때 제정된 계율 중에서 10가지는 고쳐야 된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니

이를 10사(十事)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금은 등 화페수납을 허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당시 인도는 생산력이 발달하고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상업도시가 꽤 많아졌고 그곳에서 포교하며 수행하는 출가자도 많았다. 그런 상업도시중 대표적인 도시인 베살리에 사는 출가승려들에게 이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보통 출가승에게 음식으로 보시하였다. 그런데 베살리같이 상업이 발달한 곳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화폐로 보시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돈을 받으면 음식으로 바꿀 수도 있었고, 혹 받은 직후에 바쁜일로 해서 음식으로 바꾸지

못했다 해도 다음에 쓸모가 있을 수 있으니까, 보시물이 화폐라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갔다고 하겠다. 그러나 농촌이나 산간지방에 살며 수행하거나 도시에 있더라도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입장을 가진 수행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폐를 보시받고 그것을 비축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른 무소유적 삶에

위배된다고 여겨 철저히 그 허용을 금했다. 더구나 그렇게 보시물을 비축하다 보면

아무리 승단공유라 해도 어떤 지역의 경유에는 사사로운 비축이 생길 수 있고, 그렇게 되다보면

개인 재산이 생기게 되고, 그렇게 재산이 생기는 풍조가 퍼지게 되면 승단내의 구성원 사이에도

빈부의 격차에따른 계층이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것이다.



■ 제2결집과 경전분류 작업


쟁론이 된 10가지 계율(10사) 가운데는 금은 등 화폐 수납의 문제같은 중요한 사항외에

9가지는 대체로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10사가 지향하는 바는 출가승단의 엄격한

금욕생활의 규정을 완화해 보자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팔리어 율장에 따르면, 석존 입멸 후 100년 베살리에서 그곳의 밧지푸타 비구들

10가지 사항(十事)을 들어, 율의 조문에 비추어 볼 때 그것들은 모두 정법(淨法:죄가 되지 않는 것, 즉 합법(合法,kappati dharma)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중에는 승단이 금.은을 수납하여 축적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인 야사가 유연히 베살리를 방문했다가 승단이 사람들에게 금은의 기진을 권유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단 서쪽으로 돌아간 야사는 서방의 장로비구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호소하여 결국 다시 베살리에서 동서의 비구승가를 대표하는 장로들이 합의하여 앞에서 주장한 10가지 사항이 합법인지 혹은 비법인지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회의에 참가한 사람 중에서 가장 장로격인 사르바카마의 의견이 존중되어

10가지 사항 중 9가지는 모두 비법이고 한 가지는 경우에 따라 인정될 수 있다고 하는

판정으로 매듭지어졌다. 700명이 모인 비구승가모임에서 사르바카마가 앞의 결론을 재차 확인함으로써 이 분쟁은 막을 내렸다고 한다. 이것을 제2결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초기부파불교의 역사, 민족사刊 p.229>



금전보시허용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서 벗어나 마침내 교단의 부패를 낳을 염려가 있다고 생각한 장로들에 의해서 10사는 비법으로 판정되었고,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모인 700여명의 장로들이

함께 제1결집의 내용을 검토하였다.


이때, 아난존자와 제1결집 당시에 참여한 장로들도 듣지 못했던 부처님 말씀도 상당 부분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시 700명의 장로들이 검토하여 그 가운데 명확한 증거가 있다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법으로 인정하여 첨가하였고, 그렇지 않은 것은 비법으로 거부하는 과정을 거쳐 이 제2결집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제2결집은 제1결집과 같은 전반적인 수집, 점검, 확인이었다기 보다는

특별히 율의 일부 규정에 관한 것이 주요한 대상이었고 오히려 이를 통해 제1결집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누락부분을 첨가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이 제2결집의 경우에는 경전을 형식

및 내용에 따라 크게 4가지로 분류하여 편집되었으니, 그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4아함경 - 중아함.잡아함.증일아함.장아함 -의 원형이다.


그러나, 제2결집 이후 장로들의 결정에 불복하고 10사를 인정승려 1만여명자신들의

주장에 합당한 것들을 모아 게송형식으로 부처님말씀을 결집('일만송'이라 한다)하였으며,

이들이 제2결집에 참여한 장로들과 제2결집을 따르는 승려들과는 구분되어 대중부를 이루게 된다.



■ 교단 내의 두 흐름 - 상좌부와 대중부


이런 과정을 거쳐 교단내에 입장이 다른2개의 부파가 생기게 된 셈이다.
따라서, 바로 이를 계기로 해서 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어졌다고 보는 주장도 있고,

또는,이 당시는 내부의 심각한 의견차이가 노출되었을 뿐이고, 두개의 교단으로 완전히

나뉘어진 것은 그 후로 100년이 더 지나 불멸후 200년에 이루어진 제3결집 이후부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대중부계의 율전으로 전하는 [마하승지율(摩何僧紙律)]에서도 금은 수납사항이

부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후자의 주장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제2결집 이후로 이미 승단 내부에는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리될 수 밖에 없는 두 개의 흐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입장이 모두 나름대로 부처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현실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입장을 떠나 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전보시는 허용할 수 없다고 하여

그것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항상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그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 부처님의 근본 뜻을 지키려는 노력-어느 것이 맞는가


지나가던 상인이 수행스님을 보고 환희심을 일으켜 공양하려 하는데

마침 음식은 없고 갖고 있는 돈을 보시함으로써 한끼의 공양을 올리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이런 경우 무조건 돈을 받는 것은 계율에 위배된다고 해서 보시받기를 거부했다면


그 또한 모처럼 환희심을 내어 보시의 공덕을 지으려던 사람의 마음을 물러나게하는 것이라 하겠다.

법을 구하는 수행승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기 싫다고 중생이 복을 지을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꼴이 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보시하는 사람의 그 마음을 생각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화폐보시는 무조건 금지해야 되는 것으로 규정하게 된다면, 이런 경우 도리어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저버리는 것이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금전보시를 무조건 금지해서는 안되고

상황에 따라서는 금전보시를 허용할 수도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있었던 것이다. 금전보시 허용은 금은,화폐 등을 받지 말라는(부처님 가르침의)형식을 버림으로써 오히려(부처님 가르침의)본래의 뜻을 더욱 잘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금전보시는 무소유의 율에 위배되므로 결코 허용될 수 없다는 입장이 있다 보니 의견대립이 생겼던 것이다. 이처럼 결과야 어찌됐든 각각의 입장이 모두 부처님의 법을 아끼고

그 근본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과정이었지 서로를 적대시 하는 그런 분열은 아니었다.



■ 십사(十事)의 내역


야샤스는 이 비구들의 도움을 받아 금전을 받는 행위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일에 대해

동, 서의 불교교단이 대화할 기회를 마련하였다.

 

양쪽에서 각각 4명씩 판정인을 내세워 심의를 하였는데,

결국 이 자리에 모인 700명의 장로들은 이 문제를 포함한 십사(十事)를 비법으로 단정

하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10사는 각 율전에 따라 다른 점이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뿔로 만든 그릇에 소금을 축적하는 관행(角鹽淨)

 

 2. 수행자는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

     정오를 지나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지난 시간까지 식사시간을

     연장하는 관행(二指淨)

 

 3. 다른 부락(에 가서 음식을 취하는) 관행(他聚落淨)

 

 4. (동일한 교구 안의 다른) 주처(에서 포살을 따로이 행하는) 관행(住處淨)

 

 5. (일을 결정함에 우연히 비구가 전원 모이지 않아, 먼저 참석한 사람들로 결정을 하고

    뒤에 늦게 온 사람들의) 동의(를 예상하여 정족수가 부족하여도 의결을 행하는) 관행

    (隨意行)

 

 6. (석존과 아사리의) 습관(에 따르는) 관행(久住淨)

 

 7. (식사 후에도) 응고하지 않은 우유(를 마시는) 관행 (生和合淨)

 

 8.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관행

     (飮門樓伽酒淨)

 

 9. 테두리에 장식이 없는 방석(의 크기에 관한) 관행 (無緣坐具淨)

 

10. 금,은(을 받는) 관행(金銀淨)






2. 오사(五事)


오사의 사실은 같은 설일체유부의 비교적 오래된 논서인[발지론]에서 승가의 분열과는 관계없이 오직 다섯가지 악한 견해로서 설해지고 있다.


남전 팔리어 논서에서도 오사의 문제가 언급되고 있지만 거기에는 지말분열의 최후단계에서 남인도 불교 여러派들의 異說로 설해지고 있을 뿐이다.


6세기 대승불교의 학자 바브야가 기술한 正量部의 전승(티베트에서 성립한 史書에서도 전함)에서는 근본분열의 원인으로 역시 오사를 언급하고 있지먄 그 연대는 석존 입멸 후 137년, 난다 Nanda

왕조의 마하파트마 Mahapatma 치하, 파탈리푸트라에서였다고 하였다.



 교단의 분열과 논장의 출현_ 계속되는 문제제기


어떤 사상이든 그것이 처음 세워지고 시간이 지나면 그에 대한 이해와 그 적용에 있어 입장 차이가

생기게 되고, 그 차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금씩 더 벌어지게 마련이다. 제 2결집을 전후로 생성된 교단 내의 두 흐름-진보.보수 세력간의 갈등은 결집으로 마무리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교화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부처님 입멸 후 100년이 지나도 승단은 단일조직을

유지했고 갈등은 다만 계율에 대한 부분적인 의견차이였지 가르침의 근본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었다. 경.율의 고정화에 찬성하는 보수파와 경. 율의 고정화 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끔 변형하고

적용해야 된다는 진보파간의 갈등은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었다. 결집은 합의를 봄으로써 그러한 갈등을 어느정도 정리해보고자 이루어진 면이 컸다고 하겠다.



그러나 장로 7백명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집에 대해 풀리지 않는 점을 갖고 있던 일부 진보파의

문제제기는 그냥 가라앉지 않고 계속됐다. 그렇다고 해도 일단 아라한들에 의해 결정된 결집에 근본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아라한이란 완전한 자를 뜻했고, 그렇게 완전한 아라한 7백명이 모여 결정한 결론인 결집이란 그 어떤 것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전통적인 사고때문이었다. 이것은 마치 중세의 서구사회에서 '교황의 무오류성'을 신봉한 것과 마찬가지로 권위있는 신념이었다.


따라서 아라한으로 이루어진 승단의 지도부가 내린 결정에 오류가 있다거나 부족함을 주장한다는

것은 장로들 뿐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문제제기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었고, 자연히 결집에

불복하는 진보파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변화에 따른 대중의 새로운 요구 또한 수용해야 할 승단으로서는, 고정된 경율 이외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함에 필요하다는 이론이나 실천법등에 있어 이견이 일어나는 것을 금지할 수 없었다.



■ 문제제기의 새로운 단계-아라한은 완전한가?

 

이때 대천이라는 비구가 이제까지 논쟁을 해왔던 것을 집대성하여 '5사의 신설'을 주장하였으니

그것은, 아라한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한 사건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라한은 완전한 자로서 번뇌가 없는 자였다.

대천은 그런 아라한에 다섯 가지 측면에서 한계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첫째, 여소유(餘所誘)-

 아라한은 이미 수행을 통해 스스로 번뇌를 소멸하여 번뇌가 없지만

 마왕이 번뇌를 부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번뇌가 자기 내면으로부터는 안

 생기더라도 외부로부터의 영향으로 번뇌가 있을 수 있으니, 아라한이 어떠한 경우도

 번뇌가 없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둘째, 무지(無知)-

 아라한은 비록 깨달음을 얻어 매사를 이치에 맞게 잘 판단하고 알지만,

 소소한 일에 있어서는 무지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즉 우주의 이치나 인생의 진리는 잘 안다해도 바느질을 하거나 청소를 하는 등 소소한

 일들에 있어서는 경험이 없어서 모를 수 있다는 뜻이다.


 셋째, 유예(猶豫)-

 판단에 따른 의혹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항상 스스로 옳다, 그르다 잘 판단하는데

 혹시 잘못 판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생길 수 있어 자기를 돌아보기도 한다

 것이다.


 넷째, 타령입(他令入)-

 아라한은 남으로부터 인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대대로 스승이 제자를 인정해주듯이

 누군가로부터 아라한이라고 인정받을 때 아라한이 되는 것이니, 결국 스스로 완전한

 것에 비하면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다섯쨰, 도인성고기(道因聲故起)-

 아라한도 고를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중생들은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비록 그 문제를 풀게

 된다 해도 그것을 해결하기 전 까지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성제를 깨달은

 아라한은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곧 해결하기 때문에 고가 없다고 알려졌었다.

 대천은 이에 대해 비록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해도 문제가 발생하고 해결되는 데는

 시차가  있게 마련이고, 결국에는 아라한도 바로 그때는 잠깐이라도 고를 느낀다

 것이다.

 

 예를 들어 순금이라 하면 한마디로 그 순도가 100%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순금에

 0.1%라도 이물이 섞여 있다면 어떤가. 그것은 물론 순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만

 순금이 아닐뿐이지 금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듯이 아라한도 번뇌가 있을 수

 있고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이런 이야기는 그것이 아라한이 나쁘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완전하다 무오류다 하는 것은 어떤 구석이든 0.1%라도 오류가 없어야 되는데,

 0.1%의 오류라도 있거나 있을 수 있다면 그 완전한 무오류라는 대상에서는 일단

 빗겨나는 것으로, 작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인식 속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되는것이다.





■ 급속화되는 교단 분열


그런데 여기서 대천5사에 따라 아라한이 내린 결정도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그들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이 조금이라도 인정될 수 있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확대해석을 낳을 수 있다.


'아라한이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면 7백명의 아라한이 내린 결정도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그들이 결정한 경율 가운데에도 잘못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비법이라고 규정한 것 중에도 법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그러니까 이런 한계가 있는 결집이라면 이미 정해진 법에 대한 결정이 잘못되어 있을 수가 있다 하여 진보파의 주장이 보다 타당성있게 제기되고 또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라한이 완전하다는 절대적 권위에 제기된 이 엄청난 문제에 대해 장로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진보파라고 모두 5사를 지지했다고 할 수 없었다. 당시까지-진보.보수의 두 흐름이란

완전한 분파나 별개 조직으로 운영되는 공동체는 아니었고 단지 그런 성향들이 있었을 뿐 적대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 문제에 대해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는 불법 전법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받아들여져 5사의 신설이 논란의 쟁점이 된 이후부터 교단의 분열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전에는 이 5사에 대한 이야기가 일치되어 전하고 있지는 않다.
[한편 설일체유부계의 전승에서는 근본분열의 원인을 五事에 대한 쟁론으로 돌리고 있다.

그것에 따르면 석존 입멸 후 100여 년 무렵 아쇼카 왕 치하의 파탈리푸트라에서

5가지 사항(五事)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승가는 상좌.대승 두 파로 분열하였다고 한다.




5사란 이를테면 불도를 수행하여 번뇌를 끊은 아라한이라 해도 몽정(夢情)의 현상을 면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든지, 사정에 따라서는 무지도 의혹도 남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등, 아라한에 대하여 성자성(聖者性)과 인간성과의 관련을 인정하는 5가지 사항을 말한다.


현장이 번역한 [대비바사론]에서는 이 오사의 제창자로서 마하데바라고 하는 '惡'비구의 이름을 들어 분쟁의 경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마하데바에 대해서는 같은 이름으로 여러 사람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근본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던 마하데바의 실재를 고찰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같은 설일체유부 계의 전승이 전하는 마하데바 즉 지말분열 후기 남인도에서 여러 부파가 분립하게되는 원인을 낳았던 마하데바의 존재가 훨씬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쉽다고 생각된다.



팔리어 전승에서도 마하데바의 이름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들 남인도의 여러 부파가 성립하게 된

이유로서 오사의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같은 南傳의 역사서인

[디파밤사 Dipavamsa]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뒤에 설명할 제3결집을 끝마친후

남인도의 마히사만다라 Mahisamandala(지금의 마이소르?) 지방을 교화한 마하데바라는 인물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앞에서 설명한 전승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민족사刊>



■ 이념적 갈등에서 조직분열로, 그리고 제3결집


남전의 사서(史書)에 의하면 5사의 신설을 전후로 제기된 숱한 논쟁제3결집을 통해

일단락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제3결집에 대한 이야기는 다만 이사서에만 전할 뿐 다른 경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진보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이루어졌다는 제3결집에 대한 이 사서의 기록등 보면 다음과 같아.
[제3결집이라고 하는 것은 남전의 史書에만 전하는 것이다. 그것에 따르면 석존 입멸 후 236년 아쇼카 왕 당시, 왕이 불교승가에 대해 많은 기진을 하자 이에 유혹을 느낀 6만의 비불교도

(外道)들이 승가에 잠입하여 7년간 올바른 포살이 한번도 시행되지 못할 정도

파탈리푸트라의 승가는 혼란해졌다.


왕은 분쟁을 피해 갠지즈 강 상류 산 속에 은둔해있던 장로 목갈리풋타팃사 Moggaliputtatissa를 불러 그의 가르침을 듣고, 승가에 잠입해 있던 비불교도를 색출.환속시키고 포살을 시행하여 승가를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목갈리풋타팃사는 천 명의 아라한을 모아 異說을 배척하고

정통설을 밝히기 위해 카타밧투(Katha-vatthu, 論事)를 정리하였다고 한다.



남전에 의하면 부파의 분열은 아쇼카 왕 이전에 생겼으며, 이 제3결집은 분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만 파탈리푸트라에서의 승가의 분란과 정통적인 分別說部의 法義를 유지시킨 장로

목갈리풋타팃사에 의한 그 수습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아쇼카 왕 치하에서

근본분열이 일어났다는 설은 북방에서 여러 자료에서 전해지고 있다(남전에서는 근본분열의 원인인 十事의 논쟁을 또 다른 아쇼카 왕, 즉 칼라 아쇼카 Kala Asoka의 치하라고 함).


이렇게 여러 가지로 모순되는 남.북 양전의 자료로부터 결정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기란 매우 어렵다. 다만 근본분열에 대해서만은 어떠한 전승도 석존 입멸후 100년 무렵에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밝혀두고자 한다.] <앞의 인용서.p238>



여기서 제3결집이 실행된 사실여부는 차치하고 이런 일련의 논쟁과정을 거치며 진보파의 의견이

상당히 득세하여 종전에는 승단내 일부 비판세력정도였던 것이 이제는 하나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가진 부파로 성장, 정착되어 갔다는 점을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라한과를 증득한 장로들 중에서도 진보파가 일부 있었고 교단 자체에서도 지도부 중심으로만 움직이는게 아니라

대중적 지지도 동시에 상당히 갖고 있어 진보파의 주장을 중심으로 한 제3결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원칙을 고수하고자 하는 장로들이 볼 때는 도저히 의견을 같이 할 수가 없어

제3결집에 반대를 하여 조직에서 이탈하여 상좌부가 되고 진보파쪽은 대중부가 되어 두 개의 부파로 나뉘어진다. 결국 이념적 갈등이 조직분열로까지 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