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가니까야(長部)/D15.대인연경(大因緣經)-연기·해탈

後記: 대인연경을 마치며,,,,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10. 15. 17:35

 

 

대인연경은

 

세존께서 꾸루에서 깜마 사담마라는 꾸루의 성읍에 머무실 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을 뵙고 "연기는 참으로 심오합나다. 그러니 제게는 분명히 드러납니다."라고

연기(緣起)에 대한 증득이 있는 것처럼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며, 바로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천명하시면서 시작됩니다.

 

 

 

1] 연기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먼저

 

 '1)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2)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하여 정신 · 물질이,

  3) 정신 · 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4)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5)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6)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취착이,

  7) 취착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가,

  8) 존재를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9)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 죽음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 있다."라고

 

 

 9지연기(九支緣起)를 설하십니다. 

 

 

이에 있어서 우리는 세 가지 정도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그 하나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라는 세존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조건이 있기 때문에 늙음·죽음(老死)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렇다.'라고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조건이 있기 때문에"라는 말씀은

    조건이 없거나 우연이 아니다라는 말씀으로 새겨 들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이것이라는 원인조건으로 저것이라는 결과가 발생하는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측면으로는 이것은 정해진 법이므로 이것이 있으면 반드시 저것이 있다라는 필연

    방법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이 있는데도 저것이라는 결과가 없는 경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2) 두 번째로는 이 연기법은 '원인' 즉 '왜?'라는 것에 관한 법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왜?'라는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끝없이 왜?, 왜?라고 물어나갈 때 우리는 그 한계에 부딪혀서 결국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현상은

    현상이다라고 인정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무지의 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부처님은 "재가에 머물면 전륜성왕이 되지만, 출가하면 아라한·정등각이 되어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린 자가 될 것'이라는(대전기경 D14, 1.31항)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원인을 손에 집어든 듯이 꿰뚫어 안다는 것은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리는 것

    같고 비로소 실상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사리뿟따 존자가 출가 전 앗사지 장로를 만났을 때 한 마디라도 해주실 것을 간청

    할 때 앗사지 장로가 일러준 게송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원인이 있어 생겨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일러 주셨나니

      또 이 모든 것들이 멸한다는 것, 그것까지도.

      대사문께서는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3) 세 번째로 이 부분을 매듭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일어난다."

 

    라는 말씀의 중요성입니다.

    바로 이것이 "일어남, 일어남"(대전기경 D14, 2.19항)의 지혜입니다.

    위빳사나의 도기 일어남·사라짐을 관(觀)하는 도라고 할 때 그 일어남은 이것에 다름이 아니며

    세존께서 초전법륜경(s56:11)에서 사성제를 설하실 때 "과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갈애의 실상에 대하여

 

이 중간에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갈애를 설하신 後,

다시 갈애로부터 폭력, 다툼, 비방, 거짓말 등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일어나는 도리를

9가지로 설하시는 것은 본경에서 보이는 특이한 점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이 예나 지금의 일상에서나 항상 일어나는 실상이라는 점에서,

또한 이러한 뿌리가 되는 갈애가 결국 '느낌'으로부터 시작된다점에서,

 

그리고 본 대인연경에서 '오온을 바로 봄에 따른 해탈의 과정을 설하시면서

오온 전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어떻게 관찰하는가에 촛점을 맞추어 해탈의 과정을

말씀하신다는 점에 있어서 깊히 새겨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

 

  1)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2) 추구를 조건으로 얻음이,

  3) 얻음을 조건으로 판별이,

  4)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慾貪)이,

  5)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이,

  6) 탐착으로 조건으로 거머쥠이,

  7) 거머쥠을 조건으로 인색이,

  8)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가, 

  9) 수호를 원인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 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난다."

 

  가 바로 그것입니다.

 

 

 

3] 윤회가 끝나지 않고 전개되는 도리에 대하여

 

이 9지연기((九支緣起)의 끝에서

 

 "이와같이 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냥 지나칠 말이 아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하여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라고 설해지는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연기'에 의해서 윤회가 전개되는 것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취지는 바로 앞의 경인 대전기경(D14, 2.19항)에서 같은 부분을 설하시면서

   

 "이 알음알이(識)는

  정신 · 물질에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난다."

 

라고 설하시면서 그 뜻을 분명히 하셨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인연경의 시작이 세존께서 아난다 존자에게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하시는데서

본경의 목적이 '그 벗어나지 못하는 윤회를 어떻게 벗어나는가?'가 목적임을 짐작할 수 있듯이

왜 그 윤회를 못 끝내는지(넘어가지 못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4] 윤회에 대한 표현 / 정신·물질(현상)의 존재 이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세존께서 이 윤회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1) 이름짓는 토대가 생기고,

  2) 어원에 입각한 언어의 토대가 생기고,

  3) 개념을 얻는 토대가 생기고,

  4) 통찰지의 영역이 생기며,

  5)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 조건에 의해

 

  (윤회)는 전개되는 것이다."

 

의 부분입니다.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고 격을 뛰어 넘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알음알이라 하더라도 구경의 지혜에 의해 그침을 얻지 못하면 그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연기에 따라 윤회는 계속됩니다. 따라서 께왓다경에서의 가르침과 같이 알음알이의 그침은

정신·물질의 소멸이요 그것은 바로 열반의 증득을 의미합니다.

 

 "(열반이라는) 특별한 경지는  

 

   볼 수 없고 무한하며

   모든 곳으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성소의 계단을 가졌다.

   

   여기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은 굳건히 서지 못하며

   여기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께왓다경, D11. 88항)

 

 

그 알음알이(識, 心, 意, mano)가 윤회의 전개를 넘어서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이름, 언어, 개념, (심지어는) 통찰지의 영역,

그리고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의 상호조건에 의해 전개되는 모든 윤회를 최상의 지혜로 안 뒤

벗어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정신·물질은

 이 알음알이와 더불어

 

 (오온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라는 부분입니다.

 

팔리어로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으나 영역본을 보면

",,,,,, this world -- i.e., the objectification of concepts and appearances together with cognition" 즉, "이 세상-- 말하자면 개념의 객관화(정신)와 나타남(물질)이 인지(알음알이)와 함께

하는"이라는 말인데,

 

정신·물질과 알음알이의 상호연기에 의해

정신·물질의 존재 이유를 어떤 존재가 가지고 있는(혹은 가지고 나온) 오온을 천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마치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신·물질(현상)은 거울에 비춰진

오온의 모습입니다.

 

 

 

5] 자아론 / 인식론 / 오온을 바로 봄 / 해탈 / 열반

 

위 3]에서 윤회가 전개되는 이유가

정신·물질과 알음알이의 상호연기를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천명하신 뒤,

 

세존의 말씀은

"아난다여,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자아를 천명하는가?"라고 하시어

갑자기 사람들의 자아 문제로 넘어가십니다.
이것은 큰 도약이 아닐 수 없으며 만일 해탈에 억겁의 비밀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불사(不死)의 문'을 활짝 여신 것이라면 바로 이것이 그 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도약의 이유는 정신·물질과 알음알이의 상호연기를 넘어가지 못하여 계속 전개되는

윤회의 끝을 내기 위한 '해탈'이  바로 '나' 혹은 '자아'를 바로 보는 것(正見)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나를 바로 보는 것인가?

'나 등으로 취착하는 오온을 바로 보아'서 입니다.

 

 

그러므로 윤회를 넘어가지 못하는 범부들의 자아관이 먼저 설하십니다.

현생 혹은 내생에서 물질을 가졌고 유한하다, 물질을 가졌고 무한하다,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유한하다,  물질을 가지지 않았고 무한하다와 같은 자아를 천명하고

혹은 유한한 자아 내지 유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자아에 대해 위와 같은 어떤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고

또한 유한한 자아 내지 무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해 있지 않음을 설하십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왜 범부들은 위와 같은 자아관을 가지게 되는지를

"아난다여,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관찰하면서 자아를 관찰하는가?"라고 물으시면서

그 이유를 설하십니다.

 

 1) '느낌은 나의 자아다.'(受蘊)

 2)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色蘊)

 3)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낀다.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想,行,識蘊)

 

과 같이 관찰하여 범부들은 자아를 천명하지만,

 

 

비구는

 

 1) 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으며,

 2) 자아는 느끼지 않는다고 관찰하지 않으며,

 3)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느낀다고도 관찰하지 않아

 

 취착하지 않게 되고, 갈증내지 않게 되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듦을 설하십니다.

 

 

 

6] 존재론

 

이어서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라는 십사무기(十事無記)의 여래 사후의

존재여부로 넘어 가십니다.

 

해탈한 마음을 가진 비구는 위와 같은 어떤 견해도 가졌다고 할 수 없음을 세존께서는 천명하십니다.

이것도 하나의 도약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오온을 바로 보아 '넘어가지 못하는 알음알아와 정신·물질의 상호연기'에 따른

윤회를 결국 끝낸 자, 즉 해탈한 자, 혹은 열반에 든 자, 혹은 알음알이가 그치고 정신·물질이 소멸한

세계에 든 자는 도대체 어떻게 존재를 보는가 내지 어떤 존재론을 얻게 되는가의 문제로 보면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됩니다.

 

왜 위와 같은 존재론에 이르게 되는지 세존께서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1) 이름과 그것의 토대가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던,

 2) 어원에 입각한 언어그것의 토대가 어디까지 미치던,

 3) 개념과 그것의 토대가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던,

 4) 통찰지와 그것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치던,

 5) 윤회의 회전이 그 어떤 범위까지 미치던,

     

 그 모든 것을

 비구는 최상의 지혜로 안 뒤

 해탈했다."

 

 

또한 여기에 더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언뜻 보면 말이 되지 않는

그러한 존재론을 가진 비구에게

 

'그 비구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졌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옳지 않다.'

 

라고 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7] 혜해탈 - 윤회의 끝(존재로부터 벗어남)을 상세하게 정의하심

 

이어서 세존께서는 혜해탈을 설하십니다.

앞에서 1) 연기를 2) 윤회의 전개를 3) 오온을 바로  봄인 해탈로 윤회가 끝남(존재에서 벗어남)을 

설하신 바, 이제 여기서 그 윤회의 끝을 혜해탈을 설하시면서 상세하게 논리적으로 정의하십니다.

 

혜해탈은

 

1) 욕계라는 알음알이의 거주처 
2) (범중천과 같은) 초선의 알음알이의 거주처 
3) (광음천과같은) 제2선의 알음알이의거주처 
4) (변정천과 같은) 제3선의 알음알이의 거주처 
    (제4선의 알음알의 거주처에 대해서는 아래 8)의 무상유정처 外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제4선의 알음알이의 거주처는 제3선의 알음알이의 거주처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5) 공무변처라는 알음알이의 거주처 
6) 식무변처라는 알음알이의 거주처 
7) 무소유처라는 알음알이의 거주처 

8) 무상유정처라는 알음알이의 장소
9) 비상비비상처라는 알음알이의 장소

 

로부터의 벗어남을 말하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알음알이(識)가 끝나지 않아 윤회의 전개에 따른 모든 세상

(존재의 모든 거주처인 31천, 혹은 31천의 정신·물질이라고 해도 좋다)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말하고

 

 

 

그 벗어남에 대하여는  

알음알이가 선 모든 곳 즉 모든 세상(界)에 대하여

 

그 세상(界)를 꿰뚫어 알 뿐 아니라,

그 세상(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고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혜해탈의 끝에는 이미 앞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통찰지로 사성제를 봄' 혹은 더 상세히 말하면 '나 등으로 취착하는 오온을 바로 봄'이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 혜해탈 부분은 이 대관문(大關門) 앞에까지의 상세를 설하셨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8] 심해탈(팔해탈의 온전한 증득)과 더불어 양면해탈을 설하시다

 

혜해탈에 이어서 세존께서는 팔해탈(八解脫)을 설하십니다.

이 팔해탈 부분이 왜 나오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양면해탈을 설하시면서 갑자기 마음의 해탈

(심해탈)이 등장하는 하는 바 이들의 관계성이 무엇이이냐는 것 때문에 대인연경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꽤 먼 길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 결과를 「※'해탈' 그리고 심해탈/혜해탈/양면해탈에 관한 작은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해 보았읍니다.( http://blog.daum.net/ibakdal/17371201 )

 

팔해탈의 완전한 증득은 바로 심해탈(心解脫)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앞에서 이미 통찰지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설하신 바,

이제 팔해탈로써 심해탈을 설하시고, 마지막으로  더욱 수승한 양면해탈(兩面解脫)을 설하시기

위하여 팔해탈을 설하신 것입니다.

 

'통찰지에 의한 해탈'(慧解脫, '觀'이라 하자)로써 해탈하여 열반에 들면 그만인 것이지

왜 삼매의 증득을 통한 '마음의 해탈'(心解脫, '止'라 하자)을 더한 양면해탈이 더욱 수승함을 

밝히시는 것일까?

 

혜해탈은 모든 어둠을 부셔버리는 벼락과도 위세가 있으나,

이에 심해탈을 더한 양면해탈은 모든 것을 끌어안은 산하대지의 위용이, 위험이 눈앞에 있음을

보면서도 초연한 사자의 위엄이 있기 때문이라고,,,

 

삼매에는 자비가 있기 때문이라고,,,,,  감히  짚어 봅니다.

 

 

 

이와 같이 새겼습니다.

 

 

양면해탈을 하신 모든 부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리시고 실상을 보여주신 모든 부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경을 설해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대인연경(Mahanidana Sutta)을 사경한 공덕을

 

저와 인연이 닿았던 모든 가족들을 포함한 제 가족에게 회향합니다.

닙바나 성취하시기를 ((()))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제가 잘못을 저질렀던 모든 분들,,

저에게 원수진 모든 분들에게 잘못을 참회하며 회향합니다,,,

닙바나 성취하시기를 ((()))

 

천신들을 시작으로 삽십일천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 모든 행복 축복들을 바람대로 이루기를,,,

열반으로 장애 없이 도착하기를 ((()))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2013. 10. 15

 

이르머꼬어리서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