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진암(識盡庵)/임승택교수님의 초기불교순례

62.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

이르머꼬어리서근 2013. 6. 8. 14:14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心念處)이란 무엇인가.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념처의 명상에서 세 번째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긋이 주시하면서 알아차리는 명상이 곧 이것이다.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은 마음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

예컨대 산란한 상태에 있거나 탐욕에 빠져 있을 때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응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을 실천하는 셈이다.

 

이렇듯 자신의 마음에 대해 ‘산란한 마음’ 혹은 ‘탐내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또한 이것은 일상에서 이미 자주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날뛰는 원숭이에 비유되곤 한다.

따라서 마음이 움직이는 그대로 행동한다면 어떠한 실수를 범하게 될는지 알 수 없다.

그만큼 마음이란 쉴 새 없이 여러 경계를 넘나든다.

 

렇다고 마음의 동요를 억지로 가라앉히는 것도 힘들다.

마음이란 본래부터 멈추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 마음을 집중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강제적인 집중과 억제는 더 큰 반발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한 상태를 벗어나자마자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이 더욱 산란한 상태로 치달아 나갈 수 있다.

 

 

 


원숭이와 같이 부산한 마음을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다음의 비유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린 소녀가 홀로 빈 방에서 춤을 추며 논다고 치자.

지켜보는 사람 없이 마음껏 폼을 부리면서 춤을 춘다고 가정하자. 그

 

런데 어느 순간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엿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부끄러움과 수줍음에 더 이상 춤추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 또한 이와 비슷하다.

끈기를 가지고 지긋이 응시하면 대부분의 산란함은 제풀에 지쳐 가라앉는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방황과 동요의 상태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념처경’에서는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산란한 마음 따위의 16가지 유형의 마음에 대해 언급한다

(DN. II. 299).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이들 모두를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는다.

거기에는 고요한 마음이라든가 해탈한 마음 따위의 긍정적인 상태도 포함된다.

 

이들 16가지 부정적·긍정적 마음상태는 사념처 명상이 현재 포착할 수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며, 내면의 동요를 강제적으로 억누르거나 가라앉히는 방법이 아님을 드러낸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서 알아차리라는 의미이다.

설령 고요한 마음이라든가 해탈한 마음이 발생하더라도 멈추거나 동요하지 말고 명상을 지속하라는 뜻이다.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일부러 집중된 경지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지금 이 순간의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이러한 태도는 무언가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갈애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으며

더 큰 아만과 집착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현재 펼쳐지고 있는 자신의 마음과 화해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변화는 저절로 일어난다.

산란하거나 우울한 마음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잠시 스쳐가는 현상일 뿐이다.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은

마음현상 자체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허상에 불과하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일깨운다.

마음이란 간교한 마술사와 같이 갖은 기교로써 우리를 현혹한다.

 

치솟는 분노와 물밀듯한 탐욕은 당장에라도 무엇인가에 뛰어들도록 재촉한다.

바로 그때 마음지킴이라는 내면의 빛을 스스로에게 쪼여줄 필요가 있다.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은

모든 유형의 마음현상이

나의 것(mama), 나(aham), 나의 자아(me attā)가 아님을 깨닫도록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