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리야경은
한 때 세존께서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에 머무실 때
유행승 만딧사와 목발우를 지닌 자의 제자인 잘리야라는 두 유행승이 세존을 찾아뵙고
선 채로
'자아는 이 몸입니까?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 세존께서 설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바로 앞의 디가니까야 제6경인 「마할리經」에서 그 전체가 이미 인용된 것인데
본경 즉, 제7경인 「잘리야經」에서 별도의 독립된 경전으로 다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만딧사와 잘리야의 질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하십니다.
1) 43가지의 계를 구족
2)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단속의 구족
3) 마음챙기고 알아차림
4) 필수품만으로 만족함
5) 외딴 처소를 의지하여 수행함
6)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벗어남
을 닦고 구족한 자가
1) 초선을 구족하여 머물 때,
2) 제2선을 구족하여 머물 때,
3)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물 때,
4)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물 때,
각각 그러한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이 타당한가라고
두 유행승에게 물어 보십니다.
두 유행승은 그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은
타당하다고 답합니다.
세존께서는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자아는 바로 몸이다.'라거나 '자아는 몸과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십니다.
다시 세존께서는
1) 이 알음알이가 이 몸에 묶여있음을 꿰뚫어 아는 위빳사나의 지혜
2)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들어내는 신통
3) 신통변화의 지혜(神足通)
4) 신성한 귀의 지혜(天耳通)
5) 다른 중생과 다른 인간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
6)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
7)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
을 구족하여 머무는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이 타당한가라고
두 유행승에게 물어 보십니다.
두 유행승은 그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은
타당하다고 답합니다.
세존께서는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자아는 바로 몸이다.'라거나 '자아는 몸과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십니다.
그러나
8)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에 이르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有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의 번뇌(無明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아는'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이 타당한가라고
두 유행승에게 물어 보십니다.
두 유행승은 여기에 이르러서
그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이다.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르다'라는 주장은
적당하지 않다고 답합니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세존께서는 유행승 만딧사와 목발우를 지닌 자의 제자 잘리야에게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자아는 바로 몸이다.'라거나 '자아는 몸과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설하십니다.
이에 이르러 두 유행승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는 것으로
본경은 끝을 맺게 됩니다.
자아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어떤 때는 있다가 어떤 때는 없는 것인가?
자아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자아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이 몸뚱아리는 대체 무엇인가?
자아는 이 몸인가? 자아는 이 몸이 아닌가?
자아가 이 몸이라면 이 몸이 무너지면 자아는 소멸하는가?
자아가 이 몸이 아니라면 자아는 이 몸말고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이 몸이 무너지고나면 자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심은 무슨 뜻인가? 이유가 무엇인가?
왜 세존께서는 두 유행승의 질문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초선 ∼ 사선의 4단계에 머물러 있는 각각의 비구,
그리고 첫번 째의 영지(靈知, Vijjà) 즉,
이 알음알이가 이 몸에 묶여있음을 꿰뚫어 아는 위빳사나의 지혜로부터,
일곱번 째의 영지 즉, 다른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까지를 구족한
각각의 비구에 대해서
'자아는 이 몸입니까,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릅니까?'라는 질문이 적절한가라고
긴 단계를 거쳐 되물으시는가?
어째서 마지막 영지인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에 이르러서는
두 유행승은 그런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입니까,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릅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하게 된 것일까?
어째서 두 유행승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런 비구에게 '자아는 이 몸입니까, 아니면 자아는 이 몸과 다릅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존께서는 '도반들이여, 이제서야 그대들은 바로 보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자아는 바로 몸이다.'라거나 '자아는 몸과 다르다.'라는
그러한 말은 하지 않는다.'라고 前과 같이 말씀하셨을까?
두 유행승은 무엇을 깨쳤기에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을까?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자아(自我)'라는 것을 한마디로 어떻게 보시는 것일까?
어떤 것이 '나'에 대한 바른 견해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되는 「잘리야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經의 가르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마할리경」에서 이미 인용하였으므로
별도의 경전으로 결집하지 않았을 것인데, 별도의 경전으로 다시 확립한 것을 보면
「잘리야경」은 그만큼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의(要義)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유신견(有身見)이라는 난관(難關)을 타파하지 못하여.
혹은 여기에 따른 단견(短見)에 빠져 허무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상견(常見)에 대한 집착으로 청정함, 고요함을 얻지 못하여 괴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사경한 디가니까야를 다시 정리하면서 한달 반을 헤매었던 저였습니다.
나냐틸로카 스님의 「부처님의 말씀」(The Word of the Buddha)은 결론部에 이르러
청정범행의 목적, 혹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이루어야 할 최종적인 목표인 아라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맛지마니까야」(中部)의 경전을 인용하여 가르침을 맺고 계십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이것은 나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허망한 생각은 병이며, 질병이고, 가시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허망한 생각을 극복하면
그는 침묵의 성자[muni]라고 한다.
이 침묵의 성자에게는
더 이상 (윤회하여)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으며,
떨리는 것도 없고,
욕망하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어떤 것(번뇌와 무명)이 있어서 그것에 의해서 태어나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나이를 먹어 늙겠는가?
늙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죽음이 있겠는가?
죽음이 없는데 어떻게 떨리는 것이 있겠는가?
떨리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욕망하는 것이 있겠는가?"
『中部』140『界分別經』MA III, 246
'나'는 이 몸입니다. 이 몸 밖에 '나'는 없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은 '나'입니다. 이 12處 18界 밖에 '나'는 없습니다.
육입(六入)의 오온(五蘊)은 '나'입니다. 이 오온 밖에 '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나'를 '나'라고 취착하지 않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에도, 그 대상(六境)에도, 알음알이(六識)에도
'나'라고 갈애하지 않습니다.
육입(六入)의 그 어떠한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 五蘊) 즉,
색(色, form), 수(受, feel), 상(想, perception),행(行, formation), 식(識, consciousness)에도
원인과 조건을 따라 현상(法)의 일어남·사라짐이 있을 뿐
어디를 뒤벼봐도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나'에 대한
편의상, 혹은 인습적인 표현이, 혹은 이름이 '나'일 뿐입니다.
어떤 세상 어떤 중생도 존재하는 모든 중생은 그렇습니다.
이러한 '나'를 '나' 혹은 '나의 것'이라 거머쥡니다.
그것을 이유로 이것은 괴로움입니다.
그것을 이유로 모든 괴로움은 일어납니다.
이러한 '나'는
'나'라고 취착하지 않고 오직 괴로움의 일어남과 소멸함을 보므로
감각적 욕망의 번뇌를 풀어서 벗어납니다.
이 '나'는 오온이 괴로움이라하여
그러한 '나'가 끊어져 없어져버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 '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즐거움을 갖추었다 하여
이러한 '나'를 거머쥐고 '나'가 영속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온에서 벗어나, 무명을 걷고 갈애의 속박을 풀어 환희의 '나'가 있고
그 '나'는 이미 '나'라고 거머쥘 그 어떠한 '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원인을 조건으로 형성되고, 원인을 조건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온의 더미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그것이 괴로움임을 꿰뚫어 압니다.
그는 그것 즉, 괴로움의 일어남과 소멸함을 꿰뚫어 압니다.
그러한 그, 즉 더미는 '나'라는 것의 있고없음을 여읩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존재도 입지 않습니다.
그는 원인과 조건으로부터 형성된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반연을 여읩니다.
그는 전생(轉生)을, 의처(依處)와 대상(對象)을,, 일체(一切)를 여읩니다.
그는 고요함을,
일어남과 사라짐의 그침을 증득합니다.
「청정도론」(Visuddhimagga))에서 붓다고사(Buddhaghosa)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괴로움이 있을 뿐, 괴로움을 받는 자는 없다.
행위(業)가 있을 뿐, 행위를 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에 들어가는 자는 없다.
道가 있을 뿐, 그 道를 가는 자는 없다."
『淸淨道論』 XVI, Vism 513
이것은 존재의 非실체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게송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게송은 올바른 아견(我見)을 증득한 자라면 그 청정한 입장을 동의할 수 있을지 모르나
바른 아견(我見)을 증득하지 못한 자가 이 게송만 본다면
'나'는 실체가 없는 현상이므로 아무렇게나 행위해도 되는 것이며
열반도 도닦음도 애써 구할 바가 아니라는 견해에 빠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나'라는 견해를 여의었습니다.
'나'라는 견해를 여읜 그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나'라고 하는 자였습니다.
'나'라고 하는 자는 누구였습니까?
그는 육입의 오온을 조건으로 생겨난 자였습니다.
그는 이제는 육입의 오온을 조건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의 육입이 오온하는 것은 전과 같으나 육입의 오온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그것이 괴로움인 줄 꿰뚫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떻게 육입의 오온에 매이지 않게 되었습니까?
그는 육입의 오온을 꿰뚫어 보아
無常함을, 苦임을, 나라고 취착할 것 없음(無我)을 보았고 염오(厭惡)를 일으켰으며
취착으로 일어나는 갈애와 번뇌를 풀어헤쳤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그는 지금의 그와 동일한 자입니까?
과거에는 과거의 그가 있었고 지금은 지금의 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는 무엇입니까?
그는 한 순간도 그라는 견해를 갖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는 없으므로 그는 그 무엇으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나는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을 끊어버린 채 머물고 있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름을 이르머꼬어리서근이라고 합니다.
오직 괴로움이 일어나고 괴로움이 머물 뿐,
나는 괴로움이었다네.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묶여
산 같이 많은 죄 겁없이 지었고,
슬픔과 괴로움 가득하였다네.
일어남 사라짐 속 나 없음을 보았나니
고요함과 즐거움 비로소 보았네.
왼발은 계행이요 오른발은 지혜니
두려움 가득히 스승의 길 따라가네.
이와 같이 받아지녔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
20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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