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해탈 - 풀어서 벗어남
해탈(解脫)이란 무엇인가.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무언가에 구속된 상태로부터 풀려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부정적인 정서와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탐냄·성냄·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들이 엮어내는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해탈이란 궁극의 목표인 열반(nibbāna)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감각적 욕망이 빚어내는 번뇌를 가라앉히고,
존재로 인해 야기되는 번뇌를 소멸시키고,
무지로 인해 발생한 번뇌들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곧 초기불교에서 지향하는 해탈의 이상이다.
해탈에 해당하는 빨리어(Pāli) 용어로서 위목카(vimokkha)와 위무띠(vimutti)가 있다.
위목카는 세속을 초월한 지고한 경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행이 진척되어 나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최종적인 지혜를 얻지는 못했지만
명상에 몰입하여 그때그때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경우가 있다.
혹은 여전히 번뇌가 남아 있지만 수행이 깊어감에 따라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폭넓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 위목카이다.
이것의 용례로는
세간적인 해탈(世間解脫, lokiya-vimokkha)이라든가
명상의 깊이 따른 여덟 단계의 해탈(八解脫, aṭṭha-vimokkhā) 따위가 있다.
위목카는 해탈이라는 것이 고원한 경지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낡은 사고와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혹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미지들로부터,
혹은 내면에 간직해 둔 바람이나 욕구들로부터,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혹은 밖으로부터,
혹은 안팎 모두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위목카라는 표현은 이러한 모든 경우에 적절히 사용될 수 있다.
위목카는 현실적인 삶의 지평에서 점진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그러한 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위무띠는 이상의 과정을 통해 얻는 결과로서의 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위무띠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더욱 빈번한 용례를 보이며, 보통
마음의 해탈(心解脫, cetovimutti),
지혜의 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
양자를 구비한 해탈(兩分解脫, ubhatobhāgavimutti) 등으로 나뉜다.
마음의 해탈이란
내면을 고요히 하는 것을 통해 탐냄 따위의 부정적 정서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지혜의 해탈이란
지혜로써 온갖 잘못된 견해와 무지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양자를 구비한 해탈이란
부정적 정서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지혜를 갖추는 방식으로 둘 다를 완비한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세 가지 위무띠 가운데
지혜에 의한 해탈과 양자를 구비한 해탈은 곧 아라한의 경지를 의미한다.
예컨대 아라한이라는 성위(聖位)에 도달한 이가 있다면
이들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의 해탈을 성취한 이로 볼 수 있다.
일시적으로 얻어진 평온의 상태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마음의 해탈만으로는 궁극의 자유에 도달하지 못하며,
진리를 꿰뚫는 지혜가 있어야만 최종의 목표인 열반의 경지를 이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불교 수행의 관건은 결국 지혜의 완성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탈을 성취하는 방법에 관련하여, 이것이 이루어지는 다섯 장소(五解脫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첫째,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듣는 것,
둘째,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 배운 내용을 가르치는 것,
셋째, 배우거나 들은 법을 그대로 익히는 것,
넷째, 배우거나 들은 법을 깊이 사유하는 것,
다섯째, 적절한 명상의 대상을 찾아 마음을 모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언급대로라면 해탈이 이루어지는 여건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하다고 할 수 있다.
해탈의 여정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될 수 있는 점진적 실천으로 이루어진다.